정부, 건강보험료 개혁보류-제2의 연말정산?
정부가 올해 안에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반드시 추진하겠다던 계획을 돌연 철회하고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고소득 직장인 등에게 건강보험료 부담이 커질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어서 연말정산 세금 폭탄 여파에 이어 여론이 더욱 악화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정치적 계산으로 졸속 정책 뒤집기에 나선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질 전망이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28일 오후 국민건강보험공단 기자실을 찾아 “올해 안에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안을 만들지 않고 내년으로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기획단을 구성해 2013년 7월부터 20여차례 회의를 열고 개편안을 마련했으며, 29일 언론 공개를 앞두고 기자들에게 설명회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문 장관은 그 이유로 “개선 기획단이 내놓은 개편안은 2011년 자료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로 정책을 결정하려면 좀더 폭넓은 표본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지부는 최신 자료를 반영한 시뮬레이션 결과를 4, 5월쯤 내놓을 계획을 이미 세워둔 터여서 이같은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부는 연초부터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파장 등 증세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건보료가 인상될 일부 고소득자의 반발이 예상되자 갑작스레 개편 추진을 철회한 것으로 해석된다.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안은 현재 근로소득(직장가입자)과 재산(지역가입자)의 이중 기준을 적용하는 부과체계를 소득 중심으로 단일화하는 것으로, 임대?금융 등 추가 소득이 있는 근로소득자, 피부양자로 등록돼 건보료를 내지 않던 고소득자에게 보험료를 더 물리는 내용이 담겨 있다.
지난해 12월 송년회에서 “담뱃값 인상 등 큰 과제를 했으니 새해(2015년)에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이 꼭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던 문 장관은 이날 “추가 소득이 있는 근로소득자나 피부양자 부담이 늘면 솔직히 불만이 있을 것”이라며 미루는 속내를 드러냈다. 심지어 개편 작업에 참여한 실무단조차 개편 철회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과체계 개선 기획단장인 이규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날 “처음 듣는다. 2월 중에 (최종)안을 정하기로 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문 장관은 27일만 해도 “개편안 보도 시점을 2월 26일로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당초 지난해 9월로 예정됐던 개편안 발표가 수차례 미뤄진 끝에 철회된 것이다.
건보공단이 공론화를 시작한 2012년 1월 이후 3년간의 개편 논의가 하루 아침에 뒤집히면서 고소득자의 무임승차나, 은퇴 후 갑자기 지역가입자가 돼 보험료를 2~3배 내는 불합리한 문제를 개선하는 일도 무위로 돌아가게 됐다. 또 부과체계 개편으로 보험료 부담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지역가입자들은 불만을 터뜨릴 것으로 보인다. 문 장관은 이를 의식해 “(지역가입자에 대해) 별도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덧붙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불합리한 건보료 알면서도… 고소득층 눈치보기?
한 언론에 의하면 수천만원 연금소득이 있는 데다 재산이 5억원인 김종대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지난해 말 퇴임 이후 건강보험료를 한 푼도 안 내고 있다. 약 1년 전 밀린 공과금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는 매달 5만140원을 건보료로 냈었다. 현행 제도 안에서 김 전 이사장과 송파 세 모녀에게 부과된 건보료는 모두 ‘합법적’이다.
정부는 이렇게 저소득자에게 깐깐하고, 고소득자에게 느슨한 건보료 부과체계를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28일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직접 “(올해) 추진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나섰다. 정부가 스스로 구성한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기획단’이 1년여 만에 최종 결과물을 내놓으려는 때에 정부가 나서서 이를 차단했다. 서민과 중산층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내팽개쳤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문 장관은 불과 하루 전인 27일 세종시에서 기자들을 만나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 보도 시점을 미뤄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는 “누군가 (더) 부담이 가는 것에 대해 문제 삼기 시작하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국회나 다른 부처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면 논의를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연말정산에 대한 여론 악화로 건보료 부과체계 개선안을 논의조차 못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여론이 ‘개선 반대’로 흐를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제대로 여론을 예측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기획단 시뮬레이션 결과 부과체계 개선으로 건보료가 오르는 대상은 전체 가입자 중 소득이 많은 1.5∼6.0%밖에 안 된다. 이들은 임금 외 종합소득이 2000만원 이상인 고소득 직장인과 고소득 피부양자 등으로 33만5000∼132만2000가구 정도 된다. 소득 상위 6% 이내의 고소득층 여론만을 의식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국민 대다수인 70% 안팎은 보험료 변동이 없다. 저소득 자영업자의 27.2%는 보험료가 깎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연말정산 파동으로 악화된 여론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라면 기회’였다. 정부가 관심 있는 여론은 극소수의 고소득층인 셈”이라고 꼬집었다.
시뮬레이션에선 2011년 자료를 토대로 2013년도 보험료율 5.89%를 적용했다. 정부는 이것도 문제 삼았다. 너무 오래된 자료라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자료만 있으면 시뮬레이션 하는 데 1주일이면 충분하다”고 반박했다. 지난해 건보 자료는 5월에 나온다. 오래된 자료라 참고하기 어렵다는 정부의 논리는 ‘억지’라는 지적이다.
돌변한 정부…무슨 일 있나?
기획단이 꾸려진 건 2013년 7월이다. 학계·재계·노동계 전문가 등 16명이 참여했다. 복지부는 회의 내내 소극적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난해 9월 기획단의 ‘최종보고서’를 토대로 정부안을 내겠다고 했지만 3개월여 동안 진전이 없었다. 기획단은 정부 요청에 따라 회의를 다시 했고, 14일 최종보고서를 내려고 했었다.
이때 복지부는 다시 제동을 걸었다. 대통령 업무보고와 겹친다며 발표 시점을 29일로 미뤘다. 복지부 업무보고는 22일이었다. 그러다 끝내 ‘없었던 일’이 되자 기획단 관계자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익명을 요구한 기획단 소속 위원은 “정권 지지층인 고소득자들에게 욕먹지 않겠다고 대다수 국민의 피 같은 돈을 불합리하게 걷겠다는 속셈이 놀랍다”고 했다. 도대체 어느 계층이 정권 지지층이란 말인가?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