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위기에 사법부 수장 공백 초래하는 정치권
문 대통령, "사상초유 사법수장 공백 안된다"…김명수 인준 호소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사법부 새 수장 선임은 각 정당의 이해관계로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민주주의 요체인 입법·사법·행정 3권 분립의 관점에서 봐주시길 바란다"고 밝혔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지수다. 문 대통령은 이날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국회 인준과 관련한 입장문을 통해 "현 대법원장 임기가 24일 끝난다. 그 전에 새로운 대법원장 선임 절차가 끝나지 않으면 사법부 수장 공백 사태라는 헌정사상 초유 사태가 벌어진다"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3권 분립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법부 수장을 상대로 하는 인준절차에 예우와 품위가 지켜지는 것도 중요하다"며 "인준 권한을 가진 국회가 사정을 두루 살펴 사법부 수장 공백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란다"고 거듭 강조했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뉴욕 출국을 하루 앞둔 문 대통령이 취임 이후 고위 공직자 국회 인준과 관련해 국회와 국민을 상대로 직접 메시지를 낸 것은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상황이 매우 엄중하며, 유엔총회장으로 향하는 제 발걸음은 한없이 무겁다"라며 "하지만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이익을 지키고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해 어느 때보다 노력하겠으며 국제사회가 우리와 함께 평화적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게 설득하겠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대법원장 후보자의 국회 인준 문제도 제 발걸음 무겁게 한다"며 "그동안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에 노력했지만 부족했던 것 같아 발걸음이 더 무겁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엔총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각 당 대표를 모시겠다"며 "국가안보와 현안 해결을 위해 논의하고 협력을 구하겠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문 대통령은 현안 중 사법부 공백을 막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보고 계신다"며 "내일 출국해 22일 밤에 오시기 때문에 그사이에 별도로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할 시간이 없어서 가시기 전에 국회에 대해 마지막 호소를 드리는 것"이라고 입장문 발표 취지를 설명했다.
그간 국회와의 원활한 소통이 부족했다는 언급과 관련, 이 관계자는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건 등 국회에서 진행되어야 할 여러 절차가 잘 진행되지 않은 데 대해 대통령도 책임감을 느끼시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김 후보자 인준절차에서 '예우와 품위'를 강조한 것과 관련해서는 "비록 김 후보자가 국회에서 인준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사법부 수장에 대해서는 장관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닌 사법부를 대표하는 수장이라는 3권 분립의 한 축이란 관점에서 예우와 품위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김 후보자 인준에 대한 사실상의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의당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과 관련, 이 관계자는 "그 문제는 민주당이 국회에서의 협의 과정에서 잘 풀어주실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전 헌재소장 낙마로 헌법재판소가 '김이수 대행체제'로 당분간 이어갈지에 대해서 그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국민의당, "김명수-NO!"
한편,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인준의 ‘캐스팅보트’인 국민의당은 김 후보자 인준 절차에 협조할 수 없다는 강경 기류를 유지하고 있다. 야당도 사법부 독립성 침해를 이유로 김 후보자 인준에 반대하고 있다. 야3당은 김 후보자 인준 협조를 요청한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에 싸늘한 반응을 내놨다. 국민의당은 “사법부 공백 사태를 가장해 국회를 압박하지 말라”면서 여당 지도부의 사과 입장 표명을 거듭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책임을 국민의당에 돌리며 ‘땡깡’ ‘적폐 연대’ 등 발언을 한 것을 공개 사과하라는 것이다. 김동철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17일 “김 전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이후 국민의당 의원들이 환호하고 포옹했다는 민주당 측 거짓 선동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당은 김명수 후보자 심사경과보고서 채택 과정에는 동참하되 그 이후의 표결 일정 협의 등에는 참여하지 않을 방침이다. 다만 호남 민심 이탈을 우려하는 당내 의견이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자유한국당은 심사경과보고서 채택에도 협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당은 “대통령은 왜 입만 열면 되뇌던 여론에 맞서가며 김명수 후보자에게 목을 매느냐. 결국은 사법 권력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유한국당 고위 관계자는 “김 후보자가 대법원장이 되면 사법부가 좌경화될 우려가 높다”면서 김 후보자 지명 철회를 촉구했다. 바른정당 역시 김 후보자의 ‘이념 편향성’을 문제 삼았다. 바른정당은 문 대통령의 협조 메시지에 대해 ‘몽니’라는 표현을 쓰며 맹비난했다.
헌법학자들, 사법부 수장 공백사태 우려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가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한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다수의 헌법학자들은 “입법부의 일원인 보수야당이 사법부 수장 인준 문제를 정치적 이해관계나 정파적 논리와 결부시키는 건 대통령의 임명권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자 국회의 견제권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권력분립의 틀을 깨는 심각한 행위”라는 비판도 나왔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17일 “일반 각료 인준 여부 결정과 대법원장 또는 헌법재판소장 인준 문제는 다르게 봐야 한다”며 “사법기관 수장을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사법독립이라는 대원칙 자체가 깨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낙마에 이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처리마저 불투명해지면서 법조계에서는 사법부 수장 공백 사태에 대한 우려가 매우 커지고 있다. 지난 1월 박한철 전 헌재소장 퇴임 이후 헌재는 230일 가까이 권한대행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 역시 양승태 대법원장 임기가 만료되는 오는 24일까지 김 후보자 인준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 대법원장이 재판장인 전원합의체 심리는 사실상 멈추어 서게 된다.
헌법 제104조 제1항은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한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에 동의권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상황에 대해 다수의 헌법학자들은 “국회가 너무 나갔다”고 평가했다. 임지봉 서강대 로스쿨 교수는 “대통령의 임명권에 대한 국회의 견제 장치는 어디까지나 보조적 수단”이라며 “임명권을 대신할 정도에 이르면 남용에 해당한다”고 했다. 김 전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이 삼권분립 원칙에 따른 정당한 결정이었다는 야당 주장에 대해서도 “만약 부결이 국민의 뜻이었다면 진작 했어야 했다”며 “소장 공석 사태를 반년 넘게 초래하며 사실상 대통령의 임명권 행사를 방해했다”고 지적했다.
야권은 김 후보자의 이념적 편향성, 경력 등을 이유로 대법원장 자격이 없다는 논리를 펴지만 학자들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문현 이화여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현 대법원이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권한이 대법원장에게 집중됐다는 게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는데, (김 후보자에게) 왜 대법관 출신이 아니냐고 추궁하는 건 제대로 된 비판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김종철 연세대 로스쿨 교수는 "헌재소장이나 대법원장이 지위를 수행할 만한 전문성을 갖췄느냐, 도덕적 흠결이 있느냐의 차원이 아니고 정파 논리로 검증을 하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는 결국 '사법의 정치화'를 야기한다는 측면에서 청와대와 정치권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 장영수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청와대가 사법부 수장들에 대해 코드 인사를 한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야당이 반대할 수 있는 사유는 된다"고 했다. 전종익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만약 사법부 수장 공석 사태가 현실화된다면 그건 국회와 정부 모두의 책임"이라고 꼬집었다.임 교수는 "(국회 등이) 타 헌법기관을 존중할 의무를 위반하고 있다"며 "정치권의 힘겨루기에 최고 사법기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지닌 국민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들의 마음에 어느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권이 국가존망의 안보위기 상황에 헌법해석 문제를 일으키고 서로 잘나고 옳아 국가를 바르게 작동시키는 뇌(腦)마저 고장내고 있다.
스포츠닷컴 정치1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