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원 이사회, 노조,주민 반발에 막혀 무산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5·6호기 공사 일시중단 결정을 위해 한국수력원자력 경주 본사에서 열릴 예정이던 이사회가 13일 노조 반발로 결국 무산됐다. 한수원 관계자는 "오늘 이사회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차후 장소와 시간을 다시 정할 방침이다"고 밝혔다. 이날 이사회 개최 시간인 오후 3시가 임박해 승합차 1대를 함께 타고 한수원 본사를 찾은 조성희씨 등 비상임이사 6명은 노조에 막혀 본관 광명이세관 출입을 하지 못했다. 노조는 이사들에게 자신들 의견을 밝히고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결사반대" 등 구호를 외쳤다.
이사들은 10분 가까이 노조에 막혀 있다가 차를 타고 사라졌다. 이어 1시간 30여분 뒤인 오후 4시 42분께 조 비상임이사 일행은 본관 진입을 다시 시도했다. 그러나 노조가 출입을 재차 막자 조 비상임이사는 "오늘 이사회 개최는 어려울 듯하다"고 밝히고 일행과 발길을 돌렸다. 그 뒤 한수원 측은 이사회 개최 무산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한수원 이사회는 상임이사 6명과 비상임이사 7명 등 13명으로 구성했다. 상임이사는 이관섭 사장을 포함한 한수원 직원이며 비상임이사는 교수, 전문가 등 외부 인사다. 상임이사 6명에 비상임이사 한 명만 더 찬성하면 과반수 찬성으로 안건을 의결할 수 있다.
이사회 개최 저지에 나선 한수원 노조는 오후 1시부터 한수원 공식 발표 때까지 지하와 본관 1·2층 출입문에 노조원 20명씩을 배치해 이사들 출입을 통제했다. 본관 로비에서는 노조원 150여명이 '대책 없는 탈원전정책 즉각 포기하라'는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한수원 정문 앞에서도 울산 울주군에서 온 주민 380여명이 5·6호기 공사 일시중단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경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본사 안팎에 10여개 중대 800여명을 배치했다. 이관섭 한수원 사장은 이사회에 앞서 오후 2시 10분께 본관 옆 한 건물에서 울주군 주민 대표 등을 만나 간략한 의견을 밝혔다. 이 사장은 "정부 방침에 따라 공론화 과정을 거쳐 국민 판단을 받아보자는 것이 우리 기본 입장이다"며 "만약 공사를 중단하더라도 주민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겠다"고 말했다. 한수원 노조 측은 "정부가 백년지대계인 에너지정책을 졸속으로 추진해 이사회를 원천봉쇄 했다"며 "앞으로 계속 이 같은 방식으로 원전 정책을 추진한다면 계속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한수원 노조의 입장
이번 사태의 노조 입장은 기존 노사관계의 노조활동과 다소 거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 한국수력원자력 노동조합은 13일 이사회 원천봉쇄에 대해 “에너지 정책이 너무 졸속적으로 추진돼 결사적으로 막았다”고 밝혔다. 김병기 한수원 노조위원장은 이날 이사회 무산 이후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탈원전의 모델로 독일의 경우를 예로 들지만 독일은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국민적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며 “정부가 바뀐 것에 따라 에너지정책이 수시로 바뀌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체르노빌 사고와 후쿠시마 사고로 탈원전을 주장하는 나라는 네 곳밖에 없다”며 “사고가 있었던 일본조차 원전 재가동을 검토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또 “3개월만에 졸속 추진된다는 것에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며 계속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원전의 안전”이라며 “한수원 직원들은 불철주야 최선을 다해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온 사람들을 마피아라고 한다면 모든 대한민국 국민도 마피아가 된다”며 “대안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심도 있는 과정을 거쳐 에너지정책이 수립돼야 한다는 것이 노조의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향후에도 이런 정책 추진하겠다면 지금의 방식, 또 다른 방식으로 제대로 된 정책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수원이 신고리 5·6호기 중단에 대해 결정할 경우에 대해서는 “필요하면 법적인 조치, 국회나 여러 경로를 통해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며 “이사회가 제3의 장소에서 건설 중단을 기습 가결한다면 물리적인 집회도 계획하고 합법적인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산업부에서 내린 일시중단 공문은 협조사항일 뿐”이라며 “신고리 5·6호기 중단을 위한 이사회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겠다는 확답이 있을 때까지 오늘과 같은 원천봉쇄를 풀지 않겠다”고 밝혔다.
노조는 만약 이사회가 강행돼 건설 중단이 가결된다면 배임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불법적인 이사회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등의 법적 조치도 강구한다는 방침이다.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공론화위원회에 대해서는 “심의위원 9명 가지고 결정할 문제 아니며 공론화위원회 자체를 반대한다”며 “독일을 답습한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등 수순을 밟아야 하며 국민들의 합의를 거친 가운데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관섭 사장과 주민들, 노조의 대화에 대해서는 “특별한 내용 없었고 상생에 대해 이야기했다”며 “한수원에 대한 믿음을 더 가져달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주민들 입장-‘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중단 반대’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중단을 반대하는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주민들은 이날 오후 1시쯤부터 한수원 정문 앞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정문 인근에 무대를 세우고 주변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즉각 폐기하라' '자율 유치한 신고리 5,6호기 예정대로 건설하라' 등의 현수막을 내걸었다. 주민들은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경주의 최고 기온은 39.7도까지 치솟아 올 들어 전국 최고 기온을 기록했는데 이런 폭염 상황에서도 시위를 강행했다.
손복락(54) 서생면주민협의회 원전특위원장은 "지역 주민들이 신고리 원전 1호기 건설 때부터 40년간 재산권을 침해 당했지만 참고 살았다"며"국책사업 추진에 도움이 되고자 희생을 감수하면서 협조했는데 지금 와서 갑자기 공사 중단으로 되갚는다고 하니 배신감마저 든다"고 말했다. 서생면 신리에 사는 김경완(52)씨는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가 진행되면서 이주 대상으로 결정돼 감정평가까지 받은 상태였는데 갑자기 공사가 중단된다고 하니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김모(52)씨는 "집 주변이 모두 파헤쳐져 완전히 폐허가 됐는데 원상복구도 할 수 없고 그냥 죽으라는 소리로 들린다"며 답답해 했다. 신고리 5,6호기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도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될까봐 불안해 하고 있다. 서생면 명산리에 사는 이상훈(62)씨는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만 수천 명이나 되는 대형 공사가 갑자기 중단되면 인부들은 물론 공사장비업체와 주변 식당 등이 모두 타격을 입게 된다"고 주장했다.
스포츠닷컴 사회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