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대하 사극 '정도전'
(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영화 '변호인' 중 송우석 변호사의 대사)
"백성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 것이다"(KBS 드라마 '정도전' 중)
독립영화가 될 뻔한 영화 '변호인'이 천만 관객의 가슴에 새긴 대사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헌법 1조다.
폐지나 고물을 주워 팔아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세금을 걷겠다는 지금의 정부는 소작인들에게 소출의 8~9할을 세금으로 가져간 고려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인권 변호사로 용공 사건 재판정에서 대한민국 헌법 1조를 외친 전(前) 대통령과 600년 전 '백성을 위한 나라'를 주창하며 조선을 건국하고 설계한 정치가 정도전이 재조명되는 이유는 아마도 같을 것이다.
고려말 난세를 극복하고 역성혁명을 이룬 정도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 KBS 1TV의 정통 대하 사극 '정도전'(연출 강병택 극본 정현민)이 방송 초반부터 장년 남성들을 TV 앞으로 끌어들이며 호평받고 있다.
2년여 준비 기간을 거치며 제작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사실 고증이다. 철저히 사실에 기초한 '사극다운 사극'을 내걸었다.
정현민 작가는 수십 권의 역사서 원전을 정독하고 역사학자들을 만나 자문했다. 등장인물 모두의 전기를 찾아 참조했고 드라마 속 인물들의 직책은 실재 인물의 관직과 완벽하게 일치할 정도다.
드라마는 왕이나 귀족이 중심이 되는 사극이 아니라 정도전을 비롯해 나라의 운명과 백성을 위해 고민한 '정치인'들을 조명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성리학을 젊은 학문으로, 패배주의로 여겼던 사대주의를 실용적이고 자주적인 외교 노선으로 새롭게 바라본다.
궁벽한 시골 향리 가문 출신으로 신진 관료가 된 정도전은 땅에 떨어진 대의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지만, 10년 동안 유배와 유랑 생활로 버티던 그가 백성의 존경을 받던 무장 이성계를 찾아가면서 역성혁명이 시작된다.
그는 "임금은 존귀한 존재지만 그보다 더 존귀한 것은 천하민심이다. 천하민심을 얻지 못하는 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쓴 조선경국전을 통해 조선의 법과 제도의 기틀을 닦고,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만든 설계자이기도 하다.
이성계는 고려인 혈통이지만 원에서 귀화한 탓에 정체성을 고민하며 반백이 될 때까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치르며 충성심을 강요받은 슬픈 운명의 무장이었다.
그는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덕장 중의 덕장이지만, 내성적인 면도 있고 술을 마시면 가벼운 주사도 보이는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다.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정 작가는 현실 정치를 보는 듯 노련한 정치인들의 불꽃 튀는 설전을 녹여내고 있다.
공민왕 사후 고려 왕실의 실권자가 된 이인임이 자신의 견제자로 관료에 임명된 정도전에게 "이제 말단의 한을 푸셨으니 소원성취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정도전은 "이 정도로 되겠습니까? 늙은 호랑이 한 마리 정도는 때려잡아야 소원성취라 하겠지요"라고 응수한다.
"늙은 호랑이는 영물이라 했는데 그리 쉽게 잡히겠소이까?", "사냥개가 제법 독이 올랐거든요", "짖는 개는 물지 못합니다. 모르시오?", "미친개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과 노회한 권문세족의 상징인 이인임을 연기하는 박영규, 이성계 역의 유동근, 최영 역의 서인석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에 시청자들은 "1시간이 10분 같았다"며 몰입하고 있다.
특히 유동근은 1996~1998년 시청률 60%에 육박하는 인기를 끈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맡았었고, 이번에는 이방원의 아버지 이성계를 연기하며 북방 사투리로 눈길을 끌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1/31 08: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