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전당대회, 당대표 "김무성" 선출
<정치특집>
[권맑은샘 기자/스포츠닷컴]
새누리당의 새 대표에 김무성 후보가 당선됐다. 또 4명의 최고위원에는 7선의 서청원, 재선인 김태호, 6선의 이인제 의원이 득표 순으로 선출됐고, 재선인 김을동 의원은 여성을 선출직 최고위원으로 반드시 두도록 한 규정에 따라 지도부에 입성했다. 김 신임 대표는 이날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대의원 투표와 일반국민 여론조사를 합산한 결과 총 5만2천702표를 획득, 3만8천293표에 그친 서청원 의원을 크게 따돌리고 1위에 올랐다.
포옹하는 신임 서청원 최고위원, 김무성 당대표
김 신임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 온몸을 바치겠다"면서 "새누리당이 보수 혁신의 아이콘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또 경선 과정에서 서 의원과의 갈등을 의식한 듯 "풍우동주(風雨同舟)라는 표현처럼 어떤 비바람이 불더라도 우리는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당의 화합을 강조했다. 김태호 의원이 2만5천330표를 얻어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였던 3위를 차지했고, 이인제(2만782표) 홍문종(1만6천629표) 의원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김을동 의원은 1만4천590표로 6위였고, 김상민(3천535표) 박창달(3천293표) 김영우(3천67표) 의원이 하위권에 머물렀다.
*새누리당 신임대표 김무성 그는 누구인가?
14일 새누리당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된 김무성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YS)로부터 정치를 배운 '상도동계'의 막내로 비주류, 비박근혜계의 좌장으로 불린다. 15대부터 19대까지 내리 국회에 입성한 5선의 김 신임대표는 현재 부산 영도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데 '무대(김무성 대장)'라는 별명으로 통할 만큼 강한 추진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의원으로 평가된다.
김 신임대표는 본관이 김해(金海)로 1951년 9월20일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 화랑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서울 중동고등학교와 한양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전남방직과 신한제분을 운영하며 당대 거부 반열에 올랐던 부친(김용주) 덕분에 그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골목대장 노릇을 해 '무대'라는 별명도 그 때 붙었다. 김 신임대표의 첫걸음은 기업이었다. 동해제강 상무,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역임하면서 성공한 '젊은 리더'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다 정치 스승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하자 그는 사업체와 주식 등을 정리하고 창립 멤버로 참여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200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에 선임됐고, 후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추대됐다.YS 정부 청와대와 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그는 1996년 15대 총선(부산 남구을)을 통해 처음 여의도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재선, 3선에 성공하며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 했다. 그러나 2008년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초기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친박근혜계 좌장으로 낙인찍혀 당시 친이명박계가 친박근혜계를 배제한 소위 '공천 학살'로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에반발,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돌풍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2010년, 그는 세종시 수정안을 내며 박근혜 대통령과 다른 길을 걸었고 2년 뒤 제19대 총선에서 공천 탈락의 수모를 당했다.
당시 그는 고심 끝에 '백의종군'을 선택했고 우파 분열을 막아냈다. 김 신임대표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으로 귀환했다. 당시 캠프 전체에 금주령을 내리고 야전침대에서 생활하며 분투해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이후 2013년 4·24 재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에 출마해 국회로 돌아왔다. 김 신임대표 특유의 배짱과 추진력은 몇몇 일화에서 드러난다.
18대 국회에서 김 의원이 원내대표를 하던 시절, 한-EU FTA가 지지부진할 때 그는 여당, 야당, 정부 등 모든 관계자들을 원내대표 방으로 불러모아 '문 잠가라. 합의 못하면 아무도 못나간다'는 엄포로 통과시켰다. 지난해 말 철도노조 파업이 계속됐을 때도 야당 박기춘 의원과 함께 실마리를 풀어 냄으로써 "정치가 모처럼 제 몫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무성 프로필 :
*1951년 부산 *중동고 *한양대 경영학과 *고려대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 수료 *부경대 명예정치학 박사 *동해제강 전무 *삼동산업 대표 *민주화추진협의회 창립 멤버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총무국장·기획조정실 부실장·국회행정실장 *민주자유당 의사국장·의원국장 *김영삼 대통령 후보 추대위 총괄국장 *제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비서관·사정비서관 *내무부 차관 *제15대 국회의원(부산 남구을) 원내수석부총무·한나라당 총재비서실장 *제 16대 국회의원 *제17대 국회의원, 국회 재정경제위원장·한나라당 사무총장·최고위원·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 *제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원내대표·국회운영위원장·비상대책위원장 *제18대 대선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총괄본부장 *재19대 국회위원(부산 영도)
이날 전당대회는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당권에 도전하는 후보들을 응원하는 지지자들과 대의원들이 모여 한 여름이 무색한 뜨거운 열기로 대회를 달궜다. 전당대회 행사 시작에 앞서 9명의 당권주자는 2층 관중석에서부터 피켓을 들고 내려오며 대결의 포문을 열었다. 곧이어 후보들은 함께 단상위에 올라 함께 ‘거위의 꿈을’ 합창하며 화합의 이미지를 선보였다. 특히 김무성 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긴장한 듯 손을 꼭 잡고 노래를 불러 이목을 끌었다.
박근혜 대통령 전당대회 참석, 적폐일소, 당화합 주문
이번 전당대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현직대통령으로는 2008년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전당대회에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공식행사가 시작된 지 10여분이 지나 빨간 재킷을 입은 박 대통령이 체육관에 들어서자 당원들은 ‘박근혜’를 연호하며 열렬히 환영했다. 박 대통령은 전당대회 축하 연설에서 “가뭄에서 강바닥이 드러나면 위기일 것이나, 강바닥에 쌓여 있는 묵은 오물을 청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라며 “정부가 가고자하는 혁신의 길이 결코 쉽지 않지만, 당원동지들과 함께라면 어떤 가시밭길이라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한편 양강 주자에 가려졌지만 젊은 40대 주자들도 전당대회 끝까지 완주함으로서 눈길을 끌었다. 40대 허리론을 내걸고 출마한 김영우 후보와 김상민 후보가 새누리당의 젊은 피로 개혁과 변화를 이야기함으로써 당의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우 후보는 공천권 개혁에 의지를 보였고 김상민 후보는 청년층의 문제 해결에 적극성을 드러냈다. 특히 두 후보자가 국무총리 인사 문제를 비롯해 정부 책임론을 거론하면서 출마해 비록 최고의원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전당대회가 당 쇄신의 장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는 평이다.
다음은 새누리당 새지도부를 이룬 인물들의 프로필이다
*서청원 최고위원 : 친박(친 박근혜)계의 좌장이자 제19대 국회 최다선(7선) 의원으로 1981년 제11대 국회에서 처음 배지를 달고 지금까지 33년간 활동해온 여의도의 '산증인'격인 원로 정치인이다. 1985년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변 인물이 주축이 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인연을 맺고 나서, YS가 집권하자 정무제1장관, 원내총무 등을 맡았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대표를 역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2004년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수감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지난 2007년 대선 경선을 연결고리로 인연을 맺었다. 당시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 후 친박계가 제18대 총선에서 대거 탈락하자 '친박연대'를 급조해 14석을 얻어내며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친박연대에서 드러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또다시 투옥돼 정치적 험로를 걷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2013년 10월 경기 화성을 보궐선거로 국회에 재입성했다.
*충남 천안(71) *중앙대 정외과 *조선일보 기자 *11.13.14.15.16.18.19대 의원 *통일민주당 총재비서실장 *정무1장관 *신한국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사무총장·대표최고위원 *친박연대 공동대표 *새누리당 상임고문
*김태호 최고위원 : 광역의원(경남도의원), 기초단체장(거창군수), 광역단체장(경남도지사)을 차례로 거쳐 여의도 중앙정치무대로 진출한 재선 국회의원. 다섯 차례 공직선거에 출마해 단 한번도 진 적이 없어 '선거의 달인'으로 불린다. 42세에 경남도지사에 당선돼 최연소 광역단체장 기록도 갖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헌정 사상 5번째 '40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차세대 리더로 부각됐지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하는 시련을 겪었다.
2011년 4·27 김해을 보선에서 당선돼 국회의원으로 변신했고, 이듬해 4월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초면에도 거리낌 없이 '형님' 또는 '누님'이라 부르는 특유의 친화력으로도 유명하다. "소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그는 장학생으로 거창농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농업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부친의 친구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고(故) 김동영 장관 집에서 하숙한 인연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경남 거창(52) *서울대 대학원 교육학 박사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사회정책실장 *경남도의원 *경남 거창군수 *32, 33대 경남도지사 *18, 19대 의원
*이인제 최고위원 : 14일 새누리당 최고위원에 선출된 이인제 의원은 충남 논산·계룡·금산을 지역구로 둔 6선 의원이다. 이 의원은 1948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 경복고와 서울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대전지법 판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며 노동계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1987년 통일민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고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3대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입문해 1988년 국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 청문위원으로 당시 노무현 의원과 함께 일약 국감 스타로 떠올랐다. 1993년 문민정부출범과 함께 최연소 노동부 장관, 민선 경기지사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의 정치인생의 분기점은 1997년 대선.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당시 이회창 후보에게 패한 뒤 국민신당을 창당해 대선에 도전한 그는 2002년 대선에서 동교동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출마했지만 당시 노무현 후보에게 고배를 마셨다.
자민련, 국민중심당을 거쳐 2007년 민주당에 복당한 이 의원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 당내 경선에서 승리해 후보로 결정됐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가 무소속으로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대선 패배를 경험했다. 이후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그는 2011년 통합 자유선진당에 입당, 2012년 4·11 총선에서 6선에 성공했다.
각종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끝내 국회에 입성하면서 '피닉제'(불사조를 의미하는 피닉스와 이인제의 합성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탈당, 입당, 복당으로 10차례 당적 변경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1948년 충남 논산 *경복고 *서울대 행정학과 *대전지법 판사 *노동부 장관 *경기도지사 *제15·17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제13·14·16·17·18·19대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비상대책위원장
김을동 최고위원 :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손녀, 야인 김두한 전 국회의원의 딸이자 탤런트 송일국씨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친박(친박근혜) 성향의 재선 의원. 18대 여성의원 중 19대 총선에서 유일하게 재선에 성공해 헌정 사상 최초의 부녀 재선의원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1967년 동아방송 성우로 방송계에 발을 들인 뒤 TBC·KBS 탤런트를 시작으로 35년간 배우 생활을 하며 각종 드라마, 영화 등 많은 작품에 출연해 유명해졌다. 1995년 서울시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고, 2008년 18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탈락한 친박(친박근혜) 의원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해 만든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5번에 이름을 올려 여의도에 입성했다.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송파병에 출마, 24년간 야당 텃밭이었던 지역에서 첫 승리를 거둬 '새누리당 광개토여왕'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인사할 때 '충성'을 외치며 거수경례하는 모습이 트레이드마크.
*서울(69) *풍문여고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중퇴 *고려대 자연과학대학원 수료 *서울시의회 의원 *백야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독립기념관 이사 *새누리당 중앙여성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자야구연맹 회장 *18, 19대 국회의원
권맑은샘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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