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진로-메르켈과 올랑드에 달려
독일과 프랑스 정부 최고지도자들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 위기를 맞아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은 유럽 통합의 성공에 각별한 이해와 책임이 있다."고 말했고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의무다."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와 올랑드 대통령은 앞서 유럽을 위기로 몰아넣은 난민 대응과 반테러 전선에서도 선봉에 서서 EU의 중심을 잡았다. 애초 양국 리더의 협력 지휘는 EU,와 '유럽 프로젝트'를 초기부터 견인한 핵심 동력이었다.
1946년 9월 19일 취리히에서 "유럽합중국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연설하며 유럽 프로젝트의 영감을 제공한 이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였지만 1951년 4월 18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조약 체결로 구체화한 '유럽'은 독·불 리더십의 결과물이었다. 특히, 독일의 산업 부흥을 견제하며 공동체의 틀 안으로 가두려는 의도도 담긴 프랑스의 주도가 두드러졌다. 독일(분단 시절 서독)은 전범국의 흑역사를 딛고 유럽의 한 복판으로 다시 나올 수 있는 계기였기에 마다할 일이 없었다.
ECSC는 이른바 '슈망 플랜'이 가져온 최초의 '현대 유럽'이었다. 로베르 슈망 프랑스 외교장관이 석탄과 철강을 초국가적 기구로 공동관리하자고 했고, 그것을 EU의 국부라는 별칭도 따르는 프랑스 경제인 겸 외교관 장 모네가 실행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과 협력 기반을 다져나가며 전후 독일을 세워가던 서독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프랑스에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프랑스의 슈망, 모네와 독일 아데나워의 궁합이 만든 ECSC는 1957년 3월 25일 로마 조약 체결로 이어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로 진화했다.
1958년부터 1969년까지 프랑스 정부를 이끈 샤를 드골과 독일의 아데나워 총리, 그리고 아데나워 후임으로 나선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총리 시절에는 대표적으로 1963년 1월 22일 양국의 화해협력 조약(엘리제 조약)이 체결됐다. 이 기간 유럽 관세체제 정비 등 통합의 심화가 진행됐지만, 드골 대통령 때 프랑스는 영국의 EEC 가입을 거부하고 의사결정 방식 등에 대한 이견으로 유럽각료이사회에 불참하는 등 독일과의 균열을 노출하기도 했다.
1970년 오일 쇼크는 하지만 독·불 리더들을 다시 뭉치게 했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슈미트 독일 총리의 앙상블은 환상이었다. 1973년 이후 9개국으로 늘어난 EEC 정상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기로 합의하고 유럽의회의 직접선거도 결정했다. 데스탱 대통령과 슈미트 총리는 나아가 1979년에는 유럽통화시스템을 만들어 경제 통합을 심화하고 미국 달러화에 맞서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선보였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 총리의 화음도 못지 않았다.
올해 집권 12년 차를 맞은 메르켈 총리는 과거 한때 사르코지 대통령과 긴밀한 호흡을 맞췄기에, 두 사람의 팀워크를 두고 '메르코지'라는 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27일 베를린에서 회동하는 메르켈 총리와 올랑드 대통령이 브렉시트 위기를 다뤄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주게 될 정치력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국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