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많은 부분서 무의식적으로 수학이론 활용"
아들에게 쓴 편지 묶어 '아빠의 수학여행' 출간 맞춰 내한
(서울=연합뉴스) 김영현 기자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1980년대 중반 미국 예일대로 유학 떠난 아들에게 정성을 가득 담은 편지를 띄웠다.
문학, 정치,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가진 학자인 만큼 안부만 묻고 끝나지는 않았다. 장문의 편지에는 철학과 역사 등 인문학 전반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잔뜩 담겼다. 인생의 이정표도 진지하게 제시했다.
아버지에게서 지적 세례를 받은 아들은 세계적인 수학자로 성장했다. 한국 수학자로는 처음으로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로 임용된 김민형(50) 박사다.
김민형 교수에게도 두 아들이 있다. 그도 그의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2005년 미국에 가족을 두고 유럽으로 연구 여행을 떠날 때였다.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사무칠 때 편지를 쓰며 마음을 다독였다.
5월 15일 첫 편지부터 6월 29일까지 꼭 스무 통을 채웠다. 몇 시간씩 매달려 사랑을 담아 쓰다 보니 분량은 매번 A4지 10장가량이나 됐다.
편지지에 타이핑한 뒤 직접 찍은 사진과 엽서 등으로 꾸몄다. 편지는 대서양을 건너가 당시 일곱 살 오신, 세 살 나일의 손에 쥐어졌다.
역시 아버지처럼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비롯해 여행하며 느낀 점, 철학, 수학 등 지적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이 편지들은 최근 '아빠의 수학여행'이라는 책으로 묶여 국내 발간됐다.
지난달 31일 서울대에서 만난 김 교수는 "아버지의 편지가 나에게 마음의 영양가가 되었던 것 같다"며 "그래도 내가 쓴 편지는 아버지가 내게 쓰신 편지만큼 심각하지는 않다"고 웃었다.
그는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편지를 썼는데 그러다 보면 감상적인 마음이 달래졌다"며 "수학에 집중이 되지 않을 때도 도움이 된 점을 고려하면 결국 편지는 나 자신을 위해 쓴 글이었던 셈"이라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낯선 곳에서 멋진 풍경을 접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편지로 소개했다. 뉴턴 수학연구소에서 잠시 연구하게 됐다며 뉴턴을 설명하기도 했다.
워즈워스, 하이네, 바이런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도 곁들였고, 김우창 교수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편지 형식이었지만 질문을 거듭하는 식으로 아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아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세상 관련 질문들이었다.
이처럼 김 교수에게 질문과 대화는 무척이나 중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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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수학자인 김민형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 (서울=연합뉴스) 세계적 수학자로 아들에게 쓴 편지를 묶어 '아빠의 수학여행' 출간한 김민형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 2014.1.2 <<은행나무 제공>> photo@yna.co.kr
"어렵게 여겨지는 것들도 대화하면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수학공부도 대화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게 중요해요. 또 한 분야를 공부하면서 끊임없이 질문하다 보면 이곳저곳에서 부딪치게 됩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따라 헤매다 보면 문학 같은 분야에서 도움을 받기도 하지요. 이 분야 저 분야의 경계가 크게 안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김 교수는 "선생이 돼 가르치기보다는 함께 학생이 돼 묻고 배우고 탐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며 "아버지는 편지에서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셨는데 나는 그처럼 윤리적으로 살지는 못한다. 다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솔직하게 사랑할 수 있는 영적인 교육, 영혼을 키워주는 교육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영국 런던 인근 해트필드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김 교수는 1년 중 3개월은 한국에서 보낸다. 서울대 수리과학부 초빙 석좌교수를 맡고 있으며 지난해부터는 일반인 대상 수학 콘서트 'KAOS'(Knowledge Awake On Stage)를 1년에 두 차례씩 열고 있다.
'KAOS'는 상호작용하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판단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서울대 수학과 동문인 박형주 포스텍 교수,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과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그는 "대화를 통해 배우는 부분이 많은데 이처럼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지는 교육은 보급하기가 어렵다"며 "사람이 서로 접촉하면서 교육할 수 있는 '인터액티브 멀티미디어 시스템' 같은 수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민형 교수는 세계적 석학 앤드루 와일즈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옥스퍼드대로 옮기며 정교수로 추천할 정도로 학계에서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다. 와일즈 교수는 1994년 수학자들이 300년 넘게 매달려 온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해 낸 저명한 수학자다.
김민형 교수가 수학계에서 이룬 성과도 와일즈 교수 못지않다.
산술 대수 기하학(arithmetic algebraic geometry) 분야 난제를 풀 수 있는 '호모토피 정수론'이라는 혁신적 이론을 제시해 크게 이름을 얻었다. 산술 기하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위상수학(位相數學, 공간의 위치관계를 다루려고 만든 수학 분야) 방법을 도입하는 발상의 전환으로 수학계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다.
한국 수학계는 김 교수처럼 뛰어난 학자를 배출했고 각종 경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정작 교육제도는 창의성을 억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교수는 "어느 교육 제도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 교육은 상당히 좋은 편"이라며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보다 훨씬 뛰어난 학생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우리 교육에 강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단점에 대한 지적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평균 수학 수준을 굉장히 높인 게 사실"이라며 "그런 바탕이 기술 산업으로 연결되지 않았나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수업에 참여하는 자세를 강조하다 보니 학생들이 전혀 모르는 상황에 부딪히면 당황하는 경향은 있다"고 덧붙였다.
수학 이론이 실생활과 동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일반인이 미적분을 배워서 어디에 쓰느냐는 말을 하지만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수학 이론을 활용하고 있다"며 "수백 년 전 첨단 이론이었던 미적분이 이제는 상식이 된 것처럼 수학의 핵심은 점점 널리 보급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소수(素數)의 세계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수학교양서 '소수 공상'을 출간한 바 있다.
김 교수는 "다음에는 더 재미있는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4/01/02 06: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