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3세 승계' 미루는 이유는?
총수 생전 승계 거론 금기시
왕조식 후계 방식 변화 필요
[류재복 대기자]
이건희 회장의 장기입원으로 인한 삼성의 '총수공백' 사태와 휴대폰 사업 실적 저하에 따른 위기상황과 관련해, 3세 조기 승계 불가피론이 제기된다. 이는 이 회장이 병상에서 일어나도 경영복귀는 힘들 것이라는 현실론에 근거한다. 삼성 임원은 20일 "이 회장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경영복귀는 어렵다고 봐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은 3세 조기 승계론에 부정적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고, 모두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권 승계 거론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15일 미국의 사물인터넷 기술업체인 스마트싱스를 2억달러에 인수하고, 19일에 북미에서 에어컨 등 가전제품을 유통하는 콰이어트사이드를 인수하기로 한 것과 관련 일부 언론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역할론을 부각시킨 것에 대해서도 반갑지않다는 반응이다.
삼성 미래전략실은 "이 부회장의 역할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삼성 쪽에선 3세 조기 승계론과 관련해 2003년 국민은행 김정태 행장 사례를 언급했다. 당시 김 행장은 희귀병에 걸려 70여일간 병원에 장기 입원했다. 김 행장은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복귀가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부행장들 중 일부는 차기행장직을 놓고 인사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김 행장은 극적으로 건강을 회복했고, 경영에 복귀한 뒤 이 일을 보고 받고 격노했다.
결국 부행장 3명의 동반퇴진 사태가 이어졌다.삼성이 국민은행 사례를 거론한 것은 총수가 세상을 뜨기 전에는 승계를 거론하거나 시도하기 힘든 한국 재벌의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의 재벌은 과거 왕조처럼 절대 권력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권력승계가 이뤄지기 어렵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 현대의 정주영 회장 등 대다수 재벌총수들은 대개 끝까지 경영의 실권을 놓지 않았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총수 생전에 아들들에게 경영권을 이양한 엘지(LG)다.재벌의 이런 승계법칙에서 벗어날 경우 총수의 아들이라도 비운의 운명을 맞을 수 있다. 실제 삼성의 경우 이병철 창업주의 장남인 이맹희 회장이 부친의 눈밖에 나는 바람에 3남인 이건희 회장이 대신 경영권을 승계했다. 이병철 회장은 1967년 이른바 '한비 사건'의 책임을 지고 경영에서 물러나고, 아들인 이맹희 회장(당시 부사장)이 그룹 총수 역할을 맡았다.
삼성 관계자는 "당시 이병철 회장의 속마음은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난게 아니라 비판여론이 약해지면 다시 복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맹희 회장은 경영권을 완전히 승계했다고 오판하고 그룹을 자기중심 체제로 개편하려다가 창업공신의 반발을 샀고 급기야 부친의 눈밖에 났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이 1973년 경영에 복귀하면서 이맹희 회장은 물러났고, 후계자 지위까지 잃었다.삼성이 현 위기상황을 고려한다면, 기존의 왕조식 후계승계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의 2대 회장시대가 사실상 끝난 상황에서 3대 회장 임명을 마냥 미루는 것은 경영권 공백의 부작용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여사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것도 이런 위기상황을 반영한다. 홍 여사는 자식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집안단속을 강화하고, 주요 경영현안도 챙기는 등 총수공백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 지배구조 전문가인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사실상 최고경영자이면서도 법적으로는 삼성전자 이사회의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이사회나 주총에서 '총수공백' 사태를 공식 거론하기 어려운 지배구조상의 특징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은 "이재용 부회장이 당장 삼성의 3대 회장으로 취임하기 어렵다면, 빠른 시일 안에 삼성전자 등기임원을 맡아, 삼성 지배구조의 불안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