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의료비 기준 벗어나도 임대료·학비 지원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김경윤 기자 = 70대 노인 A씨의 고정 수입은 국가에서 주는 기초노령연금 약 10만원과 며느리가 다달이 챙겨주는 10여만원이 거의 전부다. A씨는 그러나 법적인 부양의무자인 아들 내외가 월 400만원을 번다는 이유로 정부의 생계비 지원을 못 받고 있다. 아들 역시도 자녀 학비 등을 대기에도 빠듯해 아버지의 병원비와 용돈 외에 더 이상 부담은 힘든 실정이다.
기초수급자인 40대 여성 가장 B씨는 얼마 전 같은 동네 주민으로부터 파트타임 주방보조 일을 해보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수입이 조금만 많아도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을 해서 살림에 보탤까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의료급여 혜택이 중단되면 당장 시어머니와 남편의 병원비, 자녀 교육비를 부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회보장위원회가 14일 결정한 기초생활보장제도 개편방향에 따르면 내년 10월부터 A씨는 정부로부터 생계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고 B씨는 최저생계비 이상 돈을 벌어도 당장 의료급여 대상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전면 개편되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생계·의료비 지원 대상 10만~20만 증가 전망
지난해 8월 거제시에서 70대 노인 이모씨가 기초수급자 자격을 박탈당하고 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안철수 할머니'로 불리며 대선 국면에서 정치쟁점화 되기도 한 사례였다.
현재는 어렵게 사는 노인이라도 아들과 딸 등 부양의무자 가족이 월 392만원이상(올해 4인가구 기준)을 벌면 기초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한다. 생활이 어려운 독거노인이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하는 주된 이유다.
내년 10월부터는 부모의 최저생계비(1인 57만원)를 대고도 중간소득(중위소득) 이상이 남는 가정에만 부양의무가 지워진다. 올해 4인가구 기준 중위소득이 384만원이므로 소득이 440만원 이하라면 가난한 부모가 기초수급자에서 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복지부의 임호근 기초생활보장과장은 "부양의무를 지우는 소득기준이 높아져 기초수급자가 10만~20만명 가량 증가한 150만~160만명이 될 것 같다"고 내다봤다.
현금 생계비도 3% 정도 오른다. 현재의 생계비는, 최저생계비에서 각종 현물지원(전기료, 통신비, 4대 보험 등)분을 뺀 127만원(4인가구 기준)에서 다시 주거비 명목을 제외한 102만원이 최대치지만 내년부터는 중위소득의 30% 수준인 115만원으로 오른다. 4인가구 기준으로 13만원이 오르는 것이다.
임 과장은 "올해 생계비와 의료비 지원 대상이 각각 130만명과 150만명"이라며 "두 급여 대상자가 각각 10만~20만명 정도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돈 벌어도 주거비와 교육비 지원은 계속
또 하나 큰 변화는 생계비 지원을 못 받더라도 의료비, 주거비, 교육비 지원은 계속되는 방식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최저생계비(4인가구 기준 155만원) 기준 아래 빈곤층에게 생계, 의료, 주거, 교육 등 7개 급여 전부를 보장하는 '종합선물세트식' 또는 '패키지식'이었다면 앞으로는 소득 수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급여의 가짓수가 달라지는 '낱개씩'으로 바뀐다.
정부 잠정안을 보면, 각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준은 생계비는 중위소득 30%(올해 4인가구 기준 115만원) 이하이고 의료비는 40%(154만원) 이하로 달리 적용된다. 주거비는 40~50(192만원)% 이하, 교육비는 50% 이하이다.
현재 월수입이 160만원인 4인 가족은 아무런 기초생활보장 혜택이 없으나 내년부터는 교육비 대상이 되고 주거비 지원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저소득 세입자에 대한 혜택이 많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주거비는 현금지원에 들어 있어 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는 이 부분이 '주택 바우처'(가칭) 형식의 임대료 지원으로 바뀌면서 지원액수가 늘어난다. 국토해양부는 이를 위해 전국의 기준 임대료를 조사하고 있다.
복지종합세트에서 개별혜택으로 바뀌고, 대상자가 확대됨에 따라 혜택이 하나라도 주어지는 수급자는 2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일할 능력이 있는 수급자는 일할수록 총수입이 늘어나는 근로장려세제(EITC)가 적용된다.
지금은 일해서 수입이 소득기준을 넘어서면 모든 혜택을 일시에 박탈당할 우려가 있어 근로능력이 있는데도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행 EITC 제도에서 지원금은 연간 최대 80만원인데, 박근혜 정부는 이 액수를 더 늘리기로 했다. 현재 기초수급자들로서는 월급 155만원짜리 일자리가 있어도 각종 혜택이 없어질까 우려해 일을 꺼리게 되지만 앞으로는 일해서 160만원 정도 수익이 발생한다고 해서 당장 수급 자격에서 탈락할 걱정은 줄게 됐다.
◇ 집 있는 수급자 일부 현금지원 사라질수도
기존 수급자 처지에서 크게 바뀌는 대목은 주거급여다. 현재 주거급여는 4인가구 기준 월소득 127만원 이하 세입자와 주택 보유자에게 모두 지급된다. 통장에 찍히는 명목만 생계급여와 주거급여가 나뉘어 있을 뿐, 용도에 제한이 없어서 수급자로서는 둘 사이에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번에 사회보장위원회가 정한 개편방향에 따르면 주거비는 앞으로 주택 바우처로 지원하므로 식비나 교육비 등 다른 용도로 쓸 수 없게 된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주거비 지원이 늘어나므로 생계비 중 가용 현금이 더 늘어난다. 그러나 집이 있는 수급자에 대해선 현금보다는 집수리 등 현물로 지원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어 통장에 들어오던 돈이 갑자기 없어지는 수급자도 나올 수 있다.
올해 4인 가구 기준으로 월소득이 115만~127만원이면서 주택을 보유한 기초수급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집이 있는 수급자에 대해 현금성 지원을 완전히 없앨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복지부는 전했다.
개별급여방식으로 전환에 따라 일부 기존 수급자의 지원 내역이 줄어들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임 과장은 "가장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는 생계비 지원 대상도 늘어나므로 현실적으로 혜택이 축소되는 수급자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제도 설계 후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문제점이 나타난다면 이행기 보완대책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05/14 16:48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