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림 라시드, "디자인은 스타일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것“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m도 넘을 법한 키에 위아래로 하얀 옷을 입은 '선글라스맨'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낸 남자는 산업 디자인에서 명성을 떨치는 카림 라시드(57)다. 이집트 출신으로 미국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이 디자이너가 만든 물건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1천 원 남짓한 파리바게뜨의 앙증맞은 생수병부터 현대카드 VVIP회원 카드, 반짝이는 초자글래스의 LG 디오스 냉장고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세계 400여 곳의 기업과 왕성한 작업을 해온 작가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를 위해 최근 방한했다. 꼬박 2년의 준비 과정을 거친 서울 전시는 아시아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전시이기도 하다.
29일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작가의 뒤편에는 작가의 사진과 함께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글귀가 내걸렸다. 그는 20년 전 외쳤던 이 문장을 다시 언급하면서 디자인을 멋스러움이나 스타일리시함 정도로 보는 세간의 인식을 비판했다. "20년 전 저렇게 말했던 까닭은 디자인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매개체라는 걸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디자인을 단순히 스타일로 인식했고, 우리 경험을 향상할 수 있는 무엇인가로 여기지 않았어요. 디자인은 스타일이 아닙니다. 스타일은 과거를 모방하지만, 디자인은 현재에서 영감을 얻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죠."
이는 서울 전시 제목을 '당신 자신을 디자인하라'(Design Your Self)로 지은 까닭과도 연결된다. 디자인으로 사람과 세상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TV 세트 디자이너 등으로 일했던 아버지는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디자인이 뛰어난 작은 독일산 물건들을 사다 주곤 했다. 작가는 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대량생산을 통해 구현되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의 세계를 더 자세히 알게 됐다. 그는 이를 '디자인 민주주의'라고 칭한다. 작가 인생 30년을 돌아보는 회고전 성격인 이번 전시에서도 그러한 '디자인 민주주의'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띈다.
작가는 디지털 기술과 디자인의 접목도 중요시한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스스로 자주 묻곤 한다"면서 "디지털 시대는 독창적인 시도, 이전 시대에는 불가능했던 시도를 할 기회를 준다"고 강조했다. 일종의 디지털 회화랄 수 있는 '디지팝' 작품도 전시를 통해 소개된다. 외적인 모양만 놓고 살펴보면 작가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화려하고 강렬한 색깔이 돋보인다. 특히 전시장 곳곳을 뒤덮다시피 한 다양한 계열의 분홍은 마음을 절로 들뜨게 했다. 서울 전시를 위해 2005년 독일 뮌헨 디자인박물관 전시 작품을 새롭게 만든 '플레저 스케이프'도 아찔할 정도로 진한 분홍색이다.
"산업혁명 이후 세상은 너무 단색으로 변했다"고 잠시 한탄한 작가는 모든 색을 사랑하지만 특히 분홍을 좋아하는 이유로 "매우 아름다운 색깔이며 30년간 분노 조절 치유 목적으로도 사용된 색깔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는 디자인대회 수상작을 포함한 작품 350여점을 선보인다. 초기 디자인 원본 스케치도 공개될 예정이다. 디자인이 아닌 이론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고당한 뒤 갈 곳을 몰랐던 32세 젊은이가 어떻게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로 성장했는지 파란만장했던 이야기도 감상할 수 있다.
권병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