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이후 5년 만에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 출간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 누구나 젊은 시절에 한 번이면 다행일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는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람과 모질게 혹은 황망하게 끊어지고 자신의 위치가 가늠되지 않는 시간, 어디에서도 손 짚고 일어날 구석을 찾지 못해 철저히 혼자임을 절감하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의 한복판에 있는 독자라면 소설가 공지영이 5년 만에 낸 신작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는 마음이 몹시 어수선할 것이다. 이런 시간을 어느 정도 지나온 독자라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은 빙긋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주님의 길을 따르기로 한 스물아홉의 젊은 수사 요한이 인생을 뒤집을 것 같던 사랑 앞에 전력질주하다가 무참하게 잘려나간 뒤 홀로 견뎌내는 고통의 시간을 따라간다.
이 고통의 시간에 심지어 핏줄보다 더 도탑게 지내던 미카엘과 안젤로 수사마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요한의 곁을 떠난다. 요한이 할 수 있는 건 주님에게 "대체 왜!"라고 묻고 시간을 견디는 것뿐이다.
신자이든 아니든 극심한 고통 앞에서 "대체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난 31일 만난 작가는 "사춘기 시절부터, 또 내내 신과 씨름을 할 때 가장 많이 하늘을 향해서 던졌던 질문이 '대체 왜?', '왜 꼭 이런 방식으로?'라는 질문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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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영, 새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
- (서울=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 광주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을 다룬 '도가니' 이후 5년 만에 새 장편 '높고 푸른 사다리'를 낸 소설가 공지영 씨. 2013.11.1 zjin@yna.co.kr
이번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이 '대체 왜?'인 데는 작가의 개인적 계기가 작용했다. 지지했던 문재인 대선 후보의 '패배'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에 개인적 시련이 연달아 닥쳤다.
"대선 패배가 컸어요. 남 앞에 나서는 거 싫어하는데 평생의 원칙을 어기고 욕먹으면서도 단상에 섰고 헌신했어요. 패배는 충격이었죠. 개인적으로도 큰 신앙의 위기를 겪었고 친구 몇몇에게는 배신을 당했어요. 엎치고 덮치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질문하던 때였고 요한 수사에게 제 고민을 많이 투영했죠."
'대체 왜?'는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적 질문이지만 작가는 요한 수사가 겪는 고통의 원인과 배경을 소명하는 대신 극한의 고통과 참혹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사랑의 방식을 체득한 노(老)수사들의 삶을 보여주는 쪽으로 나아간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과 존엄은 예쁘고 좋은 말을 넘어 참담과 치욕을 몸으로 통과한 후에 나온 이야기여서, 요한 수사의 무너진 영혼에 조금씩 스며든다.
"사랑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에너지를 어디에 쓰는 게 좋을까? 더 나을까? 의미가 있을까? 10년이 지나도 잘했다고 느낄까?(중략)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 나는 사랑합니다. 그게 전부예요."(294쪽)
소설 속 노수사들은 실존 인물들이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배에 실린 짐을 모두 버리고 1만 4천 명을 피란시킨 미국인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수사, 6·25 전쟁 때 극한의 모멸을 겪고 동료의 처참한 순교를 보고도 한국땅을 떠나지 않은 독일인 수사들의 삶을 소설에 옮겨왔다.
"고귀한 품위는 잘 차려입은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고통으로 획득해 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성장하면 자유로워지더라고요. 저도 예전에는 차라리 그냥 성장을 안 할테니 고통이 없었으면 하기도 했는데 이제 와 보니 고통을 통한 자유가 있어요. 자유를 얻게 되면 살도 약간 쪄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게 되니까요.(웃음)"
제 생명의 존엄함으로 타인의 존엄을, 제 고통의 절실함으로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고 학대하는 편에 서지 않으며 상대의 행위와 무방하게 사랑을 내어주는 노수사들의 삶은 세속의 삶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태도가 전장(戰場)의 참혹을 돌파하면서 몸에 새긴 것임을 상기할 때 엄습하는 숙연함이 있다. 경북 왜관수도원과 미국, 독일 등지를 다니며 알게 된 이들의 삶에 스스로 깊은 감동을 받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는 게 작가의 얘기다.
"인간은 알수록 신물이 나지만 한편으론 알수록 경이롭기도 해요. 인간은 신과 짐승 사이의 어느 지점을 유동적으로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우주 전체에 가득한 사랑에 참여하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거죠. 사랑은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와 상관없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저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에요. 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잘 살아냈다는 자부심을 갖고 싶거든요."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2013/11/01 07:04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