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나철 순국 101주기 및 기념관 개관 1주기 기념학술토론회’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19일 ‘홍암 나철 순국 101주기 및 기념관 개관 1주기 기념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로 홍암 나철 선생의 을사오적 처단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이 토론회는 황주홍 의원 주최, 홍암나철기념사업회 주관, 보성군청, 선인역사문화연구소가 후원했다. 기념사업회 박오채 부회장, 김선배 이사 및 관계자 100여명, 내.외귀빈으로 황주홍 의원, 정상우 홍암나철기념사업회 회장, 정만화 수협중앙회상무, 사홍만 장흥군 수산업협동조합조합장, 성주현 청암대교수, 김원곤 보성군주민복지실장 등이 참석했다.
황주홍 의원은 축사에서 토론회에 참석한 인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고 특히 홍암나철 선생기념사업회 정상우 회장과 이사 및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홍암나철선생의 선구자적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전남보성군을 의향의 고장으로 만들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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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나철 선생은 누구인가?
홍암나철 선생의 본명은 인영(寅永)이고 호는 홍암(弘巖). 관향은 나주다.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에는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당시의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4년 오기호(吳基鎬:1865~1916)·이기(李沂: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를 조직했다. 그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3일간 금식농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한편 그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전해 받은 바 있었고, 1908년 도쿄[東京]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이라는 노인을 만나 대종교의 중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단군교포명서를 받았다. 그해 12월 도쿄의 어느 여관에서 이기호·정훈모 등과 함께 두일백으로부터 영계를 받았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대한 좌절로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이라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활약하던 인물들은 유신회 인물들이거나 호남 출신의 식자층 우국지사들이었다. 그래서 서민층 중심인 동학이나 증산교에 비하여 대종교를 양반종교라고도 한다. 교주인 도사교에 추대된 그는 밀계와 오대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확장에 주력하던 중, 당시 서울 북부지사교를 맡고 있던 정훈모의 친일행위로 교단 내 내분과 예상되는 일제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910년 8월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그뒤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교포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신리대전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교단본부를 백두산 북쪽에 있는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30만 교인을 확보했으나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그는 1916년 8월 15일 구월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49세의 나이로 순교조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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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 토론회에서 성주현 청암대 교수 사회로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이동언 홍암나철 기념사업회 연구실장은 제1주제로 ‘홍암나철과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발표하며 이명화 독립기념관수석연구위원과 토론이 이어졌다.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은 제2주제인 ‘을사오적 처단의거가 독립운동사에 미친영향’을 발표하며 황민호 숭실대교수와 토론이 이어졌다. 종합토론으로 박환 수원대 교수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는 애국심과 구국의 열기로 가득해 뜨거웠다.
스포츠닷컴
이기장 국회출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