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몸의 탈북남매 서울대생 되다. 남한사회 젊은 웰빙 사고지도층들 부끄러워해야
"많은 분의 도움으로 합격했습니다. 당장 보답하기는 어렵지만 도와주신 분들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서울대생이 되겠습니다." 15일 서울대학교 정문 앞에서 이영준(가명·21)씨가 축하를 전하는 이웃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씨는 2015학년도 서울대 정시 기회균형선발 전형으로 공대에 최종 합격했다. 지난 10년간 서울대에 합격한 20번째 새터민이다. 이씨의 누나(27)도 지난해 서울대에 합격해, 남매는 지난 2012년 탈북해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서울대에서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게 됐다. 새터민 형제나 남매가 서울대에 같이 다니게 된 것은 이씨 남매가 처음이다.
이영준씨, 박노겸 목사부부, 정용현 교수-서울대 정문앞
조선일보에 의하면, 남매는 북한서 시장에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북한 사회가 어려워지자 2009년 네 식구가 탈북을 감행했다. 첫 시도는 무참하게 실패했다. 중국 공안에게 체포, 북송됐고 아버지는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와 남매는 2012년 다시 탈북을 시도해 성공했다.
서울대에 합격한 이씨의 뒤에는 그를 자식처럼 아끼고 도와준 서울 양천구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다. 동네 독서실 길혜영(39) 사장은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이씨가 독서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줬다. 길 사장은 "돈을 내고도 잘 오지 않는 학생도 많은데 영준이는 매일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독서실로 와서 문을 닫는 새벽 1시까지 공부했다"고 했다.
대학에 진학하려면 '봉사 활동' 기록이 필요했지만 이씨는 '봉사 활동'이 뭔지도 몰랐다. 장애인 단체를 운영하는 박노겸(47) 목사가 이씨를 데려가 여러 차례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양천경찰서 이현숙 경위 등 보안과 직원들은 대학에 간 누나에겐 과외 자리를 소개하고, 이씨는 장학 재단에 추천해 2년간 600만원을 지원받도록 다리를 놨다.
경찰을 통해 이씨를 알게 된 동국대 행정대학원 정용현(68) 교수는 남북 체제의 차이점을 설명해주고 "약속을 잘 지키고 인간관계와 신뢰를 중하게 여겨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정 교수는 "추운 겨울에 학교에서 공부가 되느냐고 걱정하면 영준이는 '북한은 훨씬 더 추운걸요, 괜찮아요!' 했다"며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늘 밝고 자신감이 넘쳐 누구나 호의를 베풀고 싶은 친구"라고 말했다.
주위의 도움을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이씨의 노력이었다. 그는 "지난 2년 반 동안 깨어 있는 시간은 모두 공부하는 데 썼다"고 했다. 새벽 6시면 일어나서 제일 먼저 등교했고 학교 수업을 마친 뒤에는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공부했다. 수학 교사인 박영희(43) 선생님은 "탈북 학생 중에는 티나는 게 싫다며 말을 거의 안 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준이는 항상 손을 들어 질문하고 발표했다"고 말했다.
성가실 정도로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질문했다는 이씨는 고3 내내 전교 20등 안에 들었고, 특히 어려워했던 국어 과목도 지난 수능에서 1등급을 받았다. 반 친구들도 나이 많은 그를 '형'이라 부르며 따랐다. 반 분위기도 덩달아 좋아졌다고 한다. 이씨는 북한에서 공학 교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전공을 공학으로 정했다. 어릴 때부터 집 안에 있던 책도 공학 책, 자주 뵈었던 아버지 친구도 모두 공학자여서 자연스럽게 공학자를 꿈꾸게 됐다고 했다. 그는 "작년에 '로봇 다빈치, 꿈을 설계하다'라는 책을 읽고 '재난 구조 로봇' 등 로봇을 만드는 공학자가 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이씨의 어머니(53)는 하루 12시간씩 건물 청소 일을 하며 남매를 뒷바라지해왔다. 어머니는 "남편을 잃고 탈북해 한국에 온 뒤 서울대 남매 엄마가 된 소감은 한두 마디로 표현이 안 된다"고 했다. "큰딸은 과(科) 석차가 5등일 정도로 공부를 잘해요. 아버지가 바라던 걸 아이들이 다 이뤄줘 고맙고,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준 대한민국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이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씨는 "제가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학교 선생님들을 비롯한 많은 분이 저게 신경 써 주시고 진지하게 도와주셨다"고 말했다. "정말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오현 서울대 입학본부장은 "남매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다른 학생들의 귀감이 될 만큼 꿋꿋이 공부했다"며 "장차 남북한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큰 인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성과학고 김철수군, “통일 한국 위해 연구하는 과학자 되고 싶어요”
"구술 면접에서 물리 문항은 잘 대답했는데, 수학 질문에서 대답한 게 자신이 없었어요. 떨어지는 게 아닌가 했는데…." 지난 7일 서울 한성과학고에서 만난 김철수(가명)군(17·경서중)은 숫기없이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하는 평범한 중3 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탈출한 뒤 긴 여정을 거쳐 한국에 온 탈북 청소년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김군은 영재학교를 포함한 전국 22개 과학고에 입학하는 최초의 탈북 청소년이다.
탈북자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지금까지 2만7000명가량 왔다. 20년 만에 탈북자 중에서 과학 엘리트 교육을 받는 인재가 나온 셈이다. 탈북 학생들은 정상적으로 교육받는 데 어려움이 컸다. 탈북 과정에서 학력 공백이 생기는 데다, 가족 이산 등을 겪으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함경도에 살던 김군은 다섯 살 때인 2003년 부모가 먼저 탈북했다. 중국과 무역 거래를 했던 부모는 북한 기관원들에게 재산을 몰수당하자 김군을 외가에 맡기고 두만강을 넘었다. 김군을 중국으로 데려간 것은 중국 정착에 성공한 이듬해였다.
김군은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외할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국경 초소까지 데리고 갔는데, 돈을 받은 북한 군인이 저를 업어서 두만강을 건너게 해줬어요." 학령기가 된 김군은 중국 학교에 입학해 1년 공부하다 여덟 살 때인 2006년 한국에 올 수 있었다. 중국 대륙 남쪽 끝까지 내려가 미얀마 국경을 넘은 뒤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6개월을 보낸 김군은 2007년 초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처음에는 급우들이 쓰는 용어가 북한과 너무 달라 이해되지 않았지만, 곧 적응했다고 한다. 중학 시절에는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김군은 "수학과 과학을 좋아해 일찌감치 과학고에 진학하겠다고 생각했고, 작년 초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다"고 했다.
한성과학고는 전형 과정에서 김군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수학이 뛰어나 학원 교육의 결과가 아니지만 집중적으로 점검했다고 한다. 학교 측은 "학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수학 실력이 탁월해 우수한 학생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학교는 올해 서울 100여개 중학교에서 140명을 선발했으며, 경쟁률은 5.5대1이었다.
김군 가족의 수입은 부모가 민간단체 아르바이트와 정부 보조금 등으로 받는 월 150만원이 전부다. 학원에 다닐 형편이 아니다. 김군은 "그래도 학교의 학습진도를 쫓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면서 "우리가 사는 임대아파트 복지관에서 대학생 선생님을 연결해줘 가끔 도움을 얻었다"고 했다. 김군의 중학 성적은 전교 10등 전후였다고 한다. 소년의 희망은 카이스트(KAIST)에 입학해 입자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대학을 마치면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유학 가고 싶어요. 제가 태어난 북한을 위해서나, 통일 한국을 위해서나 제가 뛰어난 과학자가 되는 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요."
권맑은샘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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