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농단, 상왕 행세한 것 맞았다
엄청나고 경악할 국정농단을 일으킨 현 정부 '비선 실세'로 드러난 최순실이 마치 공식 권한을 가진 결재권자처럼 청와대와 각 부처 업무 문서를 사전에 챙겨본 정황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8일 검찰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최씨의 태블릿PC 속 문서 200여건을 대상으로 포렌식(디지털 증거 분석) 작업을 진행한 결과, 이 가운데 한두 건을 제외하고는 공식 문서번호가 붙기 전의 미완성본으로 확인됐다.
검찰이 최씨에게 유출된 것으로 판단한 문건들에는 박 대통령의 연설문이외에도 북한과 비밀 접촉 내용이 담긴 인수위 자료, 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일정을 담은 외교부 문건, 국무회의 자료 등이 망라돼 검찰도 놀라게 했다. 검찰은 정부 각 부처와 청와대의 문서 작성자, 중간 결재자들 다수를 조사해 해당 문건들이 공식 결재 라인과 비공식 업무 협조 형식으로 부속실로 넘어와 정 전 비서관의 손을 거쳐 최씨 측에 넘어간 것으로 파악했다.
검찰에 압수된 정 전 비서관의 휴대전화 음성 녹음 파일에는 최씨가 구체적으로 정씨에게 문서들을 요구한 정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음성 파일에는 문서 유출에 관한 대화 외에도 청와대 핵심 기밀인 수석비서관 회의 안건 등에 관한 대화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검찰은 구속 상태인 정 전 비서관을 상대로 최씨의 국정 개입 관여 정도를 집중적으로 추궁 중이다. 정 전 비서관은 검찰이 휴대전화 통화 내용을 토대로 문서 유출 경위를 추궁하자 박 대통령의 지시로 연설문을 비롯한 업무 문서들을 최순실 측에 전해줬다고 진술했다.
지시 배경·취지와 관련, 그는 박 대통령이 연설문 등과 관련해 국민 반응 등을 염두에 두고 사전에 의견을 구하는 차원에서 문서를 전해주라고 한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1차 대국민 사과 때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에는 일부 자료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도 있으나, 청와대 및 보좌체제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며 최씨에게 자료를 보내주도록 한 사실을 부분적으로 시인한 바 있다. 검찰은 최순실이 받아본 문서들이 공식 문서번호가 붙은 최종본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 전 비서관에게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가 아닌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만 적용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한두 건의 최종 문서가 있지만 이는 청와대 생산 문서가 아니라 정부 부처의 문서를 보고받은 것이라 법이 규정하는 대통령기록물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따라서 검찰은 정 전 비서관의 체포영장 청구 때는 혐의란에 공무비밀누설과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을 적었으나 구속영장 청구 때는 공무비밀누설 혐의만 적용했다.
검찰은 박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최씨 측에 외교·안보 등 민감한 내용이 담긴 정부 문서를 다량으로 유출했다고 사실상 시인했고, 대국민 담화를 통해 검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응하겠다는 입장도 밝힌 만큼 임기 중 기소 가능성과 관계없이 대통령을 상대로 최씨 측에 문서를 내주도록 한 경위와 의도 등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판례상 공무상 비밀누설죄는 정보를 건넨 사람만 처벌하고 받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게 돼 있어 최순실은 이와 관련한 별도의 처벌을 받지는 않을 전망이다.
최순실, 청와대 수석회의 일정·의제도 지시
또, 검찰이 압수한 정호성(47·구속)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휴대전화에는 대통령 수석비서관 회의의 일정·의제 등을 최순실(60·구속)씨와 논의하는 내용도 있었다. 수사팀은 분석 결과 상당수 파일에 정 전 비서관과 최씨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수석비서관 회의 관련 내용을 상의하는 대화가 담겼음을 확인했다. 특히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보면 최씨가 상사로서 정 전 비서관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말투라서 조사하던 검찰 수사관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민간인인 최씨가 ‘문고리 3인방’ 중 한 명인 정 전 비서관을 통해 대통령 주재로 국정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검찰 특수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로써 최씨가 정 전 비서관을 매개로 박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국정 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정 전 비서관이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전달한 것인지 등을 확인할 필요성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검찰은 조만간 ‘문고리 3인방’ 중 나머지 두 사람인 안봉근(50) 전 국정홍보비서관과 이재만(50) 전 총무비서관을 불러 이들의 개입 여부를 확인할 계획이다.
안 전 비서관은 최씨가 청와대에 검문 없이 수시로 드나들게 했다는 의혹을, 이 전 비서관은 청와대 문건이 최씨에게 전달되는 데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정 전 비서관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최씨에게 태블릿PC에 담긴 대통령 연설문 등 주요 청와대 자료와 서류 형태의 자료를 넘긴 사실을 처음으로 시인하기 시작했다.
스포츠닷컴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