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험대 오른 세계경제
유럽중앙은행(ECB), 또 양적완화로 경기부양 처방
유럽중앙은행(ECB)이 3일(현지시간) 또 매우 큰 경기부양 정책패키지를 내놓았다. 올해 들어, 1월 발표한 매월 600억유로 규모의 전면적 양적완화에 이어 사실상 두번째 대형 정책이다.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직전 통화정책회의가 열린 10월22일 기자회견에서 이번 회의때 통화정책을 재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러나 시장의 초기 반응은 월간 양적완화 규모가 확대되지 않은데다가 정책금리 인하 폭도 낮았다는 시각에서 두드러진 실망감으로 진행됐다. 유로화 가치가 이미 많이 떨어져 있음을 고려하면 이번 통화팽창적 정책들이 주로 목표 삼은 것은 저인플레 탈피다. 저유가가 지속되는 가운데 성장을 자극할 수준으로 물가상승률이 오르지 않고 신흥국 경제둔화 우려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나온 처방이라는 것이다. 적당한 물가상승을 유도하는 것으로 경기를 자극하고 기업활동과 가계소비를 활성화함으로써 성장을 유도한다는 전략이다.
2일 유럽연합(EU) 통계기관인 유럽통계청(유로스타트)가 발표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물가 통계는 저인플레의 위험신호를 적실하게 보여준다. 유로존의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예비치가 작년 대비 0.1% 오르는 데 그쳤다. 시장 전문가들의 예상치가 0.2%였으니 딱 절반이다. ECB의 중기 물가상승률 목표치가 2%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설정돼 있음을 감안하기까지하면 바닥을 뚫고 지하를 기는 형국이다. 물론 9월 한때 마이너스 0.1%로까지 떨어졌던 것에 견주면 회복된 것이지만 여전히 0%대의 저인플레, 나아가 디플레 영역으로의 진입 위협이 상존하는 흐름이다. 유로존 수출의 6%를 차지하는 중국의 경기둔화와 그리스 등 남유럽 위험채무국들의 신용경색, 가깝게는 독일 대표기업 폴크스바겐의 유해가스 저감 눈속임 사태에 이어 파리테러 발생에 얽힌 내수악화 등 위기적 징후도 ECB의 선택을 강제한 요인이다. 유로존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지난 1분기 0.5%에서 2분기 0.4%를 거쳐 3분기 0.3%로 내려앉는 등 둔화세를 보이고 있다.
이번 처방이 노리는 약발의 전망은 크게 교차한다. 이번 정책 발표가 있기 직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예금금리 인하를 두고 자산매입 프로그램인 양적완화보다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3월부터 가동된 국채 매입을 통한 전면적 양적완화 프로그램의 효과는 단시일 내에 그쳐 장기금리는 다시 반등했지만 마이너스 예금금리는 단기금리를 사상 최저로 끌어내렸다면서 이번 추가 인하가 기업과 가계 대출을 촉진하고 물가를 밀어올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로화 가치를 지금처럼 절하된 상태로 유지하고 그 덕에 수출을 통해 득을 보는 구조를 이어가는 데에도 금리 인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또한 국채 금리를 끌어내려 ECB가 매입할 국채 규모를 늘리게 되기 때문에 양적완화 이행을 촉진하는 수단으로서 예금금리 추가 인하가 제격이라는 진단도 따른다. 그동안 ECB가 국채 매입 기준을, 예금금리를 웃도는 수준의 국채로 한정해 실제 매입할 수 있는 국채가 적어 ECB의 자산매입 효과가 떨어졌다는 분석에서다. 하지만, ECB는 정작, 시장의 기대보다 보수적인 양적완화 정책을 내놓음으로써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가 오히려 오르는가 하면 영국 런던 증시의 FTSE 지수가 전날보다 2.27% 하락했다.
미 연준(Fed), 기준금리 인상 강력 시사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열흘여 앞두고 기준금리 인상을 강력히 시사했다. 옐런 의장은 “금리 인상을 더 늦추면 갑작스럽게 긴축정책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고, 이는 금융시장 혼란과 예상치 못한 경기 후퇴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12월 금리 인상을 기정사실화하는 발언에 달러값과 미국 국채 수익률이 오르고, 주가와 금값이 하락하는 등 국제 금융·원자재 시장이 요동쳤다.
앨런 의장은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경제클럽 연설에서 오는 16~17일 열리는 FOMC에 앞서 발표될 고용 및 물가, 경제활동 관련 지표의 동향을 봐야 한다는 전제를 깔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미국 경제에 대해 낙관적 견해를 밝혔다. 그는 “미국 경제는 1~2년 내 완전 고용을 달성하고 인플레이션을 목표 수준에 이르게 하는 데 충분할 정도로 완만하게(moderately) 성장할 것으로 본다”며 “향후 수년간 정부 지출도 경제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금리 인상의 제약 요건으로 지목돼온 달러화 강세, 글로벌 경기 둔화, 유가 약세 등의 요인이 점차 소멸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 9월 금리 동결 결정 때 변수가 됐던 중국 경제와 관련해서는 “중국이 올 들어 경기부양을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면 더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본다”며 “대외 리스크는 지난여름 이후 크게 줄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 경제가 통화정책 정상화를 위해 먼 길을 걸어왔다”며 “첫 금리 인상은 미국 경제가 금융위기와 대침체로부터 회복했다는 것을 알리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옐런 의장은 그러면서 금리 인상을 너무 오래 미루면 경제 과열을 막으려고 급작스럽게 긴축정책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고, 이는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주식·금값 요동
블룸버그통신과 CNN머니 등 미국 언론들은 “옐런 의장이 지난 5월 연내 금리 인상을 처음 언급한 뒤 (금리 인상에 관한) 가장 강력한 신호를 시장에 줬다”고 보도했다. 옐런 의장의 기준금리 인상 시사 발언은 미국 증시와 원자재 시장을 흔들었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에서 2월물 금선물 가격은 온스당 9.70달러(0.9%) 내린 1053.80달러로 마감했다. 2010년 2월5일 이후 5년10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미국 금리가 오르면 미국 달러화 가치가 상승하고 달러와 대체재 관계에 있는 금값은 가격 하락 압력을 받는다. 다우지수도 전날보다 158.67포인트(0.89%) 하락했다. 2년물 미 국채 수익률은 전날보다 0.03%포인트 오른 연 0.93%를 기록했다. 2010년 5월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돈 더푸는 유럽 VS 거두는 미국… '그레이트 디버전스' 본격화
이렇게 유럽중앙은행(ECB)이 예금금리 인하 등 경기 부양책에 나서고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기준 금리 인상을 강력히 시사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통화정책이 단순한 디커플링을 넘어 정반대의 길을 걷는 '그레이트 디버전스(Great Divergence)'가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달러화 강세, 유로화 약세의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지난 2002년 유로화 출범 이후 처음으로 '1달러=1유로'를 의미하는 '패리티'의 연내 현실화 가능성도 고조되고 있다. ECB가 3일(현지시간) 마리오 드라기 총재 주재로 열린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존 -0.2%이던 예금금리를 -0.3%로 전격 인하하는 등 추가 부양에 나선 것은 디플레이션 우려가 가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금금리가 마이너스이면 시중은행들이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면서 이자를 내야 한다는 의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ECB가 이번 금리인하로 기업과 가계의 대출을 촉진하고 물가를 끌어올리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이번 ECB의 결정으로 유럽과 미국의 통화정책은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됐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오는 15~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연준은 이날 재닛 옐런 의장을 비롯해 지방 연준 총재까지 나서 금리인상을 시사했다. 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장에 금리인상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돈 풀기에 여념이 없는 중국과 신흥국도 마찬가지다. 통화정책이 미국 대 유럽을 포함한 비(非)미국의 구도로 재편되는 셈이다. 미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중국은 올해 경제성장률 7%달성이 어려워지면서 금융완화에 나서고 있고 그동안 미국과 공조해 금리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던 영국조차 내년까지 확정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최근 공언한 상태다. 대부분의 신흥국도 금리를 내리고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등 경기부양에 올인하고 있는 현실이다.
경제블럭간 통화정책 엇박자-세계경제 사상유례없는 시험대
통화정책 엇박자로 세계 경제는 사상 유례없는 시험대 앞에 서게 됐다. 우선 달러화와 유로화 통화가치가 이르면 연내 사상 처음으로 등가를 이루게 될 것이 확실시된다. 유로화는 2002년 첫 출범 이후 줄곧 달러화보다 높은 가치를 유지했지만 올해 ECB의 양적완화, 그리스 위기 등 각종 악재가 겹치면서 가치가 급락한 상태다. 글로벌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올해 안에 패리티 현상이 현실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유럽 자본이 미국으로 대이동할 경우 패리티를 넘어 유로화 가치가 달러보다 낮아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세계 각국 금융시장과 수출·수입 등 실물시장, 원자재 가격에 대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각국 통화정책의 불확실성도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연준의 '나 홀로' 금리인상으로 미국으로 자본이 대거 유입되면 유럽과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경기침체가 가속화할 수 있다. 신흥국 자본이 미국으로 유출되면서 각국의 주가가 하락하고 기업들이 부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흥국들의 추가 돈 풀기로 이어져 '디커플링→신흥국 경기침체→신흥국 추가 경기부양→디커플링 심화'라는 악순환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미국과 비미국 간 금리격차가 커지는 '디버전스'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ECB의 부양책에 대한 실효성에도 의문이 일고 있다. WSJ는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금리인하가 양적완화보다 효과적이지만 현재 마이너스인 예금금리를 더 내리게 되면 금융기관과 개인의 현금 보유 성향이 커져 오히려 시장에 유동성이 부족하게 되는 '유동성 함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