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한민국史, “건국·산업화·민주화 공과, 세계사적 안목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국정 국사 교과서의 내용과 수준을 좌우하는 것은 서술의 방향과 유의점을 담은 '편찬 기준'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4일 편찬 기준을 이달 말 확정해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교육부는 2015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 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을 국편에 위임해 개발해 왔는데 이 집필 기준이 국정교과서에도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진재관 국편 편사부장은 "집필기준은 연구진이 만든 것을 의견 수렴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9월 공청회를 통해 드러난 새 집필 기준시안(試案)은 기존 집필기준의 문제점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문제점까지 더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현대사 부분에서 정치운동사와 정치·경제사가 따로 서술되고 정치운동사에 과도한 비중이 두어져 대한민국의 발전 과정을 균형잡힌 시각으로 다양한 내용과 올바른 사실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으로 여기에 좌편향의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현행 집필기준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을 통해 서술하도록 돼 있다.
반면 정치사는 '단독정부 수립' '독재' 등을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경제사는 "급속한 경제 성장이 삶의 질과 국민의 소득 증대에 기여했으나 빈부 격차 등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는 점도 유의해" 서술하도록 되어 다소 좌편향이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한국경제사)는 "이런 체계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도입, 경제개발, 민주화로 이어지는 우리 현대사의 기본 율동(律動)을 파악할 수 없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반공(反共)주의와 한·미 동맹도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부분 검정 국사 교과서는 분량도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이 '경제발전'보다 많고, '경제발전'은 경제성장과 부작용이 함께 서술돼 있어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유기적 관련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민중민주주의나 사회주의적 요소가 자유민주주의 속에 살며시 내포되어 있었다. 새 집필 기준 시안 역시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성장'을 별개로 서술하도록 돼 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새로 개발될 국사 교과서에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에서의 성과와 한계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하겠다"고 했지만 기계적·산술적 균형으로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안 명예교수는 "한국 현대사는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점프하는 데 성공한 과정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며 "새 국사 교과서는 정치운동사 뿐만 아니라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연결해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대한민국사(史)'를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새 집필 기준 시안은 또 근현대사 부분에서 관련된 세계사에 대한 내용을 빼버려 현행 검정 교과서들에 비해서도 후퇴했다는 지적을 받는 부분도 있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는 "한국 근현대사는 동 시기 세계사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며 "분량 때문에 세계사 관련 내용을 뺀다면 넓은 안목에서 제대로 된 설명도 어렵고 학생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근현대사 비중을 줄인다는 교육부 방침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서양사)는 "현대사 부분은 설명하고 바로잡아야 할 내용이 많기 때문에 충분히 서술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고 동북아 고대사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새 국사 교과서의 상고사와 고대사 부분을 강화하겠다는 방침도 주목된다. 이는 한국 고대사 권위자이며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으로 동북공정 대응의 전면에 섰던 김정배 위원장이 새 국사 교과서 제작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일견 자연스럽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검정 교과서를 위한 집필 기준을 그대로 국정교과서에 적용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어차피 새집을 짓는 마당에 헌 집의 골조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사)는 "여러 팀의 필진에게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검정 교과서와 달리 국정교과서는 권위 있는 필자에게 상당한 재량을 부여할 수 있다"며 "현실적으로 편찬 기준을 다시 만들 수 없다면 드러난 문제점을 집필 과정에서 최대한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