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정권 그리스, 시계제로
자정을 넘긴 6일 새벽 그리스 아테네 도심의 신타그마 광장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5일 치러진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안 국민투표에서 60%이상의 반대표가 나온 직후였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그리스 국기를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으며 남녀노소할 것 없이 협상안 부결을 축하했다. 디폴트(채무불이행), 유로존(유로화사용 19개국) 탈퇴 등 비관적인 상황을 목전에 둔 국민들이라고 보기엔 힘들만큼 밝은 모습이었다. 반면 찬성표를 던진 현지 자영업자들과 연금수입자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며 침통해했다.
이번 투표로 가장 고무된 이는 채권단의 추가 긴축에 맞서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진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다. 치프라스 총리는 TV연설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연대와 민주의 유럽을 위해 투표를 했다"며 "내일 그리스는 곧바로 협상장으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의 최우선 관심사는 그리스의 금융 안정을 회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여론조사기관인 메트론사가 분석한 투표결과에 따르면 이번 투표에서 반대를 선택한 이들은 주로 학생, 실직자, 농민 등이었다. 이들은 지난 6년간 정부의 긴축조치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왔으며 사회에 대한 불만도 높다.
반면 연금수입자와 자영업자들의 분위기는 침울하다. 이들은 지난달 29일 이후 시행된 자본통제조치로 은행영업이 중단돼 하루 60유로만 인출할 수 있는 현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지 자동차 부품 수입업체 A사 대표는 "이번 선거결과가 못마땅하며, 지금까지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부의 행보를 볼 때 3차 구제금융 협상이 잘 될지 과연 의문이 든다"면서 "은행권 자본통제가 풀릴 수 있도록 현 정부는 가능한 한 속히 국제 채권단과 3차 구제금융 협상을 타결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지 난방부품 수입업체 B사 대표 역시 "그리스 정부의 요구를 EU에서 즉각 지원해주지 않을 경우 그리스 경제는 자금 유동성 문제로 난관에 봉착할 것이며 3차 구제금융이 속히 실행되지 않을 경우 유로존 탈퇴는 불가피할 것"이라고 망했다. 당초 정치권과 금융 시장은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우세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스 국민이 긴축 프로그램에 불만을 품고 시리자 정권을 뽑긴했지만 국가 부도를 앞두고 추가 지원을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반대표가 쏟아지자 그리스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가 경제논리를 넘어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가 지난 2010년 첫 구제금융을 받은 후 5년간 긴축 프로그램을 진행했지만 경제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 원인이다. 과도한 긴축 정책으로 최근 8년새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은 25% 줄었다. 현재 실업률은 25%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들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스 은행들의 자금이 갈수록 줄고 있고 당장 유럽중앙은행(ECB)이 긴급자금을 지원하지 않으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다. 치프라스 총리는 투표 결과가 '반대'로 나오면 부채 탕감 등이 포함된 더 좋은 협약을 48시간 안에 체결하고 은행 영업을 7일부터 재개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역시 장담할 수 없다.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은 사임
한편, 야니스 바루파키스 그리스 재무장관이 6일(현지시간)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국제 채권단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거부한 것으로 결과가 나타난 후 사임을 발표했다. 바루파키스 장관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의 오른팔로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을 이끌었던 이번 그리스 사태의 핵심 인물이었다. 바루파키스 장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자신이 유로존 일부 재무장관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본인의 사임이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국제채권단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물러난다고 밝혔다.
바루파키스 장관은 평소 그의 자신만만하고 성급한 스타일과 잦은 미디어 출연으로 유명하다. 그는 그리스 구제금융 협상 중 유로존의 많은 재무장관들과 잦은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유로존 재무장관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바루파키스 장관은 6일 재무부의 공식 성명을 통해 “치프라스 총리는 내가 없는 것이 앞으로의 (구제금융)협상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또한 그리스는 채무 재조정을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해결책”이 매우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5일의 국민투표는 역사에 고유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라며 “나는 온전히 치프라스 총리와 새 재무장관을 도울 것이며, 우리 정부를 돕겠다”고 덧붙였다
바루파키스 장관은 국민투표에서 "반대"의 승리가 민주주의를 위한 승리이며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사람들의 용기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 바루파키스 장관은 "그리스 시민들이 외친 "오히"(oxi=no)는 민주주의자들에게 이제 막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고 5일 성명에서 말했다.
최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