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피의자신분 검찰출석
"이 세상에 진실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이완구(65) 전 국무총리가 총리직에서 물러나 칩거에 들어간지 17일만인 14일 입을 열었다. 부패척결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사정(司正) 사령관'을 자처했던 그가 부패 척결을 외친지 64일만에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으러 와서는 자신의 무죄를 다시 주장한 것이다. 이날 오전 9시55분께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사에 도착한 이 전 총리는 차에서 내려 포토라인까지 오는 동안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전 총리는 그러나 수백여명의 취재진이 진을 친 포토라인앞에 서서는 애써 당당함을 잃지않으려는 듯 굳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자신이 떳떳하다는 기색을 반영하듯, 이 전 총리는 취재진앞에서 곧바로 '진실'이라는 말을 내 뱉었다. 이 전 총리의 이날 '진실' 운운은 자신이 성 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돈을 받은 증거가 나오면 제 목숨을 내놓겠다"고 강변할 때와 한치도 달라진 게 없는 발언인 셈이다. 검찰 수사를 통해 자신이 의혹이 해소되길 기대하는 분위기도 읽혔다. 이 전 총리는 이날 오전 9시35분께 서울 도곡동 자택 앞에서 만난 기자들에게도 소명 계획이나 심경 등에 대해 "특별한 것이 없다"거나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약 20여분 뒤 서울고등검찰청사에 도착해선 작정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는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면서도 "이 세상에 진실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억울함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이 문제가 잘 풀어지기를 기대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전 총리는 이날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내 입장을 밝혔고 조사가 끝나고 나서 필요하다고 보면 여러분과 인터뷰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다"고 하고선 조사실로 향했다. 이 전 총리는 조사를 받기에 앞서 문무일 특별수사팀장과 짧은 차담을 나눈 것으로 전해졌다. 20년 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발을 디딘 이후 여권 내 충청권 대표주자로서 줄곧 승승장구하던 그는 지난 2월 국무총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것까지였다.
취임 후 부패 척결을 외치며 박근혜 정부 사정 수사를 지휘했던 그는 고(故) 성완종 회장이 남기고 간 메모 한 장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해명을 할 수록 꼬여갔다. 그는 "성 전 회장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성 전 회장과의 수백건 통화기록이 공개되기도 했다. 설화(舌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는 "목숨을 내놓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결국 스스로 총리직을 내려놔야만 했다. 전직 총리가 개인 비리로 검찰 조사를 받는 건 2009년 한명숙 전 총리 이후 처음이다. 그의 출석 발언은 이제 누가 들어도 힘이 없다. 이완구 수사는 홍준표 수사와는 달리 성완종회장이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검찰로서도 수사에 상당히 힘들 것 같은 예측이 있는 가운데 그동안 흘러나오지 않은 검찰의 카드가 있을 것인지 주목을 모으고 있다.
성완종 독대’·‘3000만원 수수’·‘회유 시도’ 규명이 수사 관건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대전지검장)은 14일 출석한 이완구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2013년 4월 4월 충남 부여 선거사무소에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있는지 추궁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돈을 받은 사실이 없으며 성 전 회장을 독대한 기억도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성 전 회장의 수행비서 등으로부터 이 전 총리에게 돈이 전달됐을 정황에 대한 진술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수행비서 금모(34) 씨는 “2013년 이 전 총리와 성 전 회장이 독대할 때 쇼핑백을 전달했다”고 진술했고, 자금 담당 직원들은 경남기업 계열사에서 성 전 회장에게 대여금이 지급된 현황을 자세히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 전 회장은 자살하기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회사에서 빌린 돈으로 이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언급한 바 있다. 검찰은 이 전 총리가 2013년 4월 부여·청양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 당시 회계 기록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제출받아, 문제의 3000만원이 선거자금으로 유입됐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였다. 검찰은 금 씨와 성 전 회장의 운전기사 여모(41)씨, 이 전 총리 전 운전기사 윤모 씨 등으로부터 성 전 회장과 이 전 총리가 독대했다는 진술을 확보했고, 차량 위성항법장치(GPS) 기록 분석을 통해 두 사람이 당시 한 장소에 있었던 동선을 확인했다.
이 전 총리는 “성 전 회장을 선거 사무실에서 본 것 같긴 하지만 단둘이 만난 기억은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총리 측은 금씨 외에 당시 쇼핑백을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재선거 후보 등록 첫날 선거사무실에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돈이 든 쇼핑백이 전달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쇼핑백을 전달했다고 말한 금 씨도 내용물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금 씨 진술도 돈을 전달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게 이 전 총리 측의 입장이다. 이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성 전 회장이 정치인에게 돈을 줬다면 부하 직원들에게 이를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경남기업 직원들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검찰은 이날 이 전 총리를 상대로 ‘성완종-이완구 회동’ 가능성을 언급한 관련자들을 회유한 의혹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회유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