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질 국회 어찌하나?
국토교통부 국장 A 씨는 최근 한 달 새 여야 국회의원 100여 명을 만났다. 의정보고서용으로 ‘금배지’들과 찍은 사진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이 간부의 ‘주가’가 급등한 이유는 올해 말까지 정부가 성안해야 하는 ‘제3차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 때문이다. 의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생색내기 사진에 A 씨의 얼굴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로 반영될 수 있는 사업 예산은 30조 원에 불과한데도 몰려든 의원들의 ‘민원 예산’만 벌써 120조 원을 넘겼다. 정부는 국가철도망 구축 계획 발표를 아예 내년 4월 총선 이후로 넘기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슈퍼 갑(甲)’ 국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나온 고육책이다.
입법권은 종종 삼권분립의 정신을 무너뜨린다. 본래 시행령 제정은 정부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에 필요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관련 특별법 시행령 제정에 국회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정부 관계자는 “국회의원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시행령을 법령으로 승격해 바꾸겠다’고 으름장을 놨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옥 대법관이 인준되기 전까지 대법관 공백 사태는 78일 동안 지속됐다. 대법관 공백사태는 안중에도 없는 몽니로 정쟁만 일삼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야당 지도부 일원의 ‘막말’은 언어 공해 수준이다. 이미 만연한 입법 권력의 폭주를 보여 주는 사례다.
대의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팽개치고 여야 합의에만 매달리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여야의 ‘야합’ 구조는 일상화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이 6일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요구가 국회 규칙에 명기되지 않을 경우 민생 법안도 처리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국회선진화법을 볼모로 한 입법 횡포라는 지적이 많았다. 다행히 이종걸 원내대표가 민생법안들을 처리한다고 했지만 공무원연금 개혁 실무기구 야당 추천 위원인 김연명 중앙대 교수는 여야 합의 당시 “한국 사회가 의원내각제로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의회 권한이 강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국내의 모 유력언론은 ‘제왕적’ 국회의원의 입법권 남용 실태와 그 구조적인 원인을 집중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입법 권력이 스스로 자정 작용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국무총리나 장관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검증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 대해서는 선출직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당별 공천 심사 단계에서부터 자질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시민단체와 유권자들도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권력 감시와 선거를 통한 국회의원 심판 역할을 충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뉴타운 재정비 법안만 19건 난립
“법안 심사를 둘러싸고 정치권이 3년째 ‘무한 도돌이표’ 공방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환멸을 느낀다.” 3년 넘게 국회에 계류 중인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 개정안 심사 과정을 지켜본 한 국회 관계자는 11일 이같이 토로했다. 국토의 균형발전이나 주거환경의 개선이라는 대계(大計)는 안중에도 없고 지역구 이익만을 지상 목표로 ‘갑(甲)질’을 하고 있는 의원들에 대한 기대를 이젠 접고 싶다는 것이다.
재개발·재건축 사업 시 필요한 절차나 의무를 규정한 도시정비법은 부동산 경기 침체로 뉴타운 사업에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라 2012년 초에 수정됐다. 2012년 2월 정비사업이 시작된 곳 가운데 일정 기간 사업이 지지부진한 곳에 대해 정비구역 지정을 자동 해제하는 ‘일몰제’를 도입하는 등의 내용이 핵심이다. 이후 국회의원들은 법의 미비점을 보완한다며 줄줄이 개정안을 발의해 19건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머리 아픈 사안, 나중에 심사하자”
개정안 19건에 대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이유는 지역구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 이익의 충돌을 조율해야 할 국토위는 올해 단 한 차례도 법안 심의를 하지 못했다. 국회 관계자는 “2월 국회에서는 4월에 논의하자고 했고 4월 국회가 되자 다음 국회에서 논의하자고 한다”며 “의원들이 ‘머리 아픈 사안’이라며 심사를 계속 미루고 있다”고 전했다. 폭탄 돌리기에 가까운 입법 횡포다.
참다못한 정부가 절충안을 냈다. 법안의 장기 계류로 다른 도시정비법안의 처리가 미뤄지자 대안을 들고 나선 것. 국토부 관계자는 “차라리 여야 간에 통일된 의견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국토위 소속 한 의원은 “자신의 지역을 대표하는지는 몰라도 다른 지역 주민들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털어놓았다.
“의원 압박에 법안 통과시켰다”
이른바 ‘아이유법’이라고 불리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도 기형적인 법안이다. 이 법안은 당초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연예인과 운동선수, 그리고 만 24세 이하인 사람은 술 광고모델로 쓸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보건복지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특정 직군을 제외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복지위는 24세 이하 주류광고 모델 금지 조항을 그대로 둔 채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복지위 소속 한 의원은 “법안소위 멤버도 아닌 새누리당 L 의원이 법안소위 회의에 덜컥 찾아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어쩔 수 없이 처리했다”고 털어놨다.
L 의원은 “청소년의 대상을 9세에서 24세 이하의 자로 규정한 청소년기본법을 원용한 것”이라며 “위헌 논란을 예상했지만 ‘아이들에게 술 광고까지 시켜야 하느냐’는 공익적 문제 제기 차원에서 추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청소년의 기준은 제각각이다. 청소년보호법은 만 19세 미만으로 정하고 있다.
전문가 “입법권력 부작용 심각한 수준”
법안 심사 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인 탓에 국회 상임위원회 중에서도 ‘갑 중의 갑’으로 불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폐해에 대한 지적도 많다. 애초 법률안의 위헌성과 다른 법률과의 충돌 여부를 심사해 법률의 합헌성, 체계 정당성 등을 확보하자는 취지였지만 이제는 법률안의 주요 내용까지 손보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법사위 관계자에 따르면 “관례상 법사위원 한 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법안이 추가 논의를 위해 법사위 2소위원회로 회부된다”며 “사실상 법사위원 개개인에게 거부권이 주어진 셈”이라고 했다. 담뱃갑에 경고 그림을 넣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 처리가 지연된 것도 법사위 소속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반대 탓이었다.
과거 제왕적 대통령제나 막강한 당 총재가 있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국회 권력의 크기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동해 이른바 ‘금융실명제법’ 전면 시행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도부의 ‘오더(지시)’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다. 의원 개개인이 사사로운 입맛에 맞춰 입법권을 휘두를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입법권력의 남용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보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민주화 과정에서 선출직의 권력이 확대됐고 법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하다 보니 입법권력이 커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왕적 꼴값야당’ 낳은 국회선진화법
“‘해머’는 사라졌지만 ‘집권 야당’이 국회를 집어삼켰다.” 4월 국회 마지막 날인 6일 여야 지도부가 공무원연금 개혁법안을 놓고 신경전을 벌여 민생법안 처리가 무산되자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런 반응이 나왔다. 시한에 쫓기는 ‘연말정산 소급입법’을 처리하기 위한 소득세법 개정안이라도 통과시키자는 새누리당의 요청에도 새정치민주연합의 뜻은 확고했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를 명기하지 않을 경우 다른 법안도 처리할 수 없다는 130석 제1야당의 몽니에 160석 집권여당은 무력할 뿐이었다.
2012년 5월 소위 ‘선진화법’으로 불린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국회법 85조 2항은 ‘국회에서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기 위해선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의 동의 또는 소관 상임위 위원 5분의 3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수결의 기본 원칙이 깨진 것으로 위헌 시비도 잇따른다. 또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다수당의 일방적 법안 처리는 불가능해졌다. 야당의 동의가 없으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장치가 만들어진 것이다.
선진화법의 등장은 국회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2008년 12월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는 공사 현장에서나 나올 법한 ‘해머’가 등장했다.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을 단독 상정하자 민주당 문학진 의원은 해머를 동원해 회의장 문을 부쉈다.
극단적 폭력을 포함해 주요 법안 처리 때마다 등장하는 여야 대치를 막기 위해 도입된 것이 선진화법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커 보인다. 야당의 ‘허락’ 없이는 어떤 법안도 처리할 수 없는 역설은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파기한 폭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 다수의 선택을 받아 다수당이 됐을지라도 핵심 정책과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수 야당의 ‘양보’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 당 관계자는 “여당의 단독 처리 수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야당에 대한 상당한 압박이 됐지만 지금 야당은 무서울 게 없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선진화법을 볼모로 ‘제왕적 야당’이라는 괴물이 나왔다는 비판도 나온다.
물론 여야 협상 과정에서 정책 빅딜(주고받기)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모든 법안 처리를 ‘주고받기’ 식으로 하는 것은 정치적 야합에 불과하다. 국가적 미래를 위한 과제는 뒤로 밀리고 특정 정파나 특정 이익단체를 챙기는 야합이 활개 치는 것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여야가 겉으로는 싸우는 척하면서도 선진화법을 계기로 비대해진 입법 권력을 즐기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선진화법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대화’와 ‘타협’으로 선진화된 국회 운영을 하겠다는 여야의 대국민 약속이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국회를 ‘선진화’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기득권을 늘리는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지적이 많다. 현재 새누리당은 선진화법과 관련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의원들 자질 검증도 제도화해야”
국회 인사청문회장에서 국회의원들은 ‘슈퍼 파워’다. 2000년 6월 처음으로 인사청문회법이 공포된 이래 청문 대상은 계속 확대됐다. 현재 국무총리 대법원장을 포함해 인사청문 대상이 된 공직자는 63명이나 된다. 철저한 자질 검증이 목표라지만 공직 후보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을 포함한 사생활 전체가 파헤쳐지면서 청문회는 공직 후보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총리나 장관 후보자 구하기가 어려워진 배경엔 이런 요인도 작용한다.
하지만 남에게 서슬 퍼런 검증의 칼을 들이대는 국회의원 본인은 선출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검증의 무풍지대에서 유유자적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국정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로 따진다면 의원들 역시 제대로 된 ‘검증대’에 서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특히 입법부의 구성원이라는 자질을 의심케 하는 국회의원이나 막말이 일상화된 ‘민의의 전당’이 품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정(自淨)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국회의원 자질 향상, 자정작업 해야”
전직 국회의장들은 국회의 입법 권력 남용과 관련해 국회의원들이 검증을 받고 스스로 자질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공감을 표했다. 김수한 전 국회의장은 11일 “국회가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고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자정작업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의원들이 공부도 하고 한 명 한 명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으로서 존엄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면서 “국회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원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주문했다. 이 전 의장은 “법안 발의 건수로 의정활동 평가를 하니 의원입법이 남발된다”며 “정부가 낸 것을 비슷하게 고쳐 내고 그런 식으로 하는데 꼭 필요한 것만 내도록 평가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은 국회 전체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좋은 국회의원을 뽑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 전 의장은 “당에서 공천을 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이 잘못된 의원들을 낙선시킬 수 있는 그런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거 때만 ‘반짝’… 실천이 관건
국회의원들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새누리당을 바꾸는 혁신위원회(새바위)가 지난해 내놓은 국회의원 자체 혁신 보고서인 레드 리포트(red report)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새누리당 이준석 전 새바위원장은 당 홈페이지에 국회의원 등을 대상으로 경력 등 기본정보뿐 아니라 전과 병역 등 8가지 도덕성 영역에 대한 자체 해명을 담은 ‘레드 리포트’를 모두에게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상향식 공천을 하자는 것으로 ‘인지도는 높지만 자질은 부족한’ 후보를 걸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새정치민주연합도 20대 총선 공천을 앞두고 현역 국회의원에 대해 상시 검증과 도덕성 검증을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달 13일 공천혁신추진단장인 원혜영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를 설치해 당 소속 광역·기초단체장, 국회의원, 지방의원 활동을 상시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이런 약속이 말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지속 가능한 제도로 정착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야가 의기투합해 입법부 전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제도를 도입해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