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조세원칙, 전문가들"정부 연말정산 대책 엉망"
정부가 이른바 '13월의 세금폭탄' 괴담을 잠재우기 위해 내놓은 연말정산 보완책 후폭풍이 만만치않다. 정부는 일단 성난 민심을 땜질식 처방과 보상으로 무마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폭탄의 뇌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오점을 남겼다. 무엇보다 추상같이 지켜야 할 조세원칙이 깨졌다. 사람들이 떼를 쓰고 여론이 악화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이를 무마해야 한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세금을 내지 않는 면세자들도 늘려 국민 모두가 조금이라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국민개세주의' 원칙에도 어긋났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는 식의 처방을 내놓으면서 국가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앞으로 '우리도 세금을 깎아 달라'는 요구가 각계각층에서 제기될 경우 정부가 어떤 명분으로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가 숙제로 남았다. 이번 연말정산 파문이 남긴 다섯 가지 부작용을 조세 전문가들의 견해로 들어봤다.
떼쓰면 들어준다-정부 3일만에 백기…전례없는 소급적용
정부가 '초유'의 연말정산 소급적용을 결정하기까지는 불과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지율이 하락한다"는 여당의 압박에 조세의 원칙이 순식간에 깨진 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처음으로 연말정산에 대한 사안을 언급한 때는 지난 1월 19일 전국세무관서장회의에서였다. 당시 연말정산에 대해 좋지 않은 여론을 감지한 정부는 예정에 없던 기자 브리핑까지 열면서 논란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고, 최 부총리는 1월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2014년 연말정산 전수조사를 거쳐 보완대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와 여당이 당정협의를 개최한 것은 다음날인 1월 21일. 여당은 연말정산 보완대책의 소급적용이라는 전례가 없는 대안을 제시했다. '청와대 비선실세 논란'에 따른 지지율 하락에 다급한 나머지 무리수를 둔 것이다. "보완대책 소급적용은 조세원칙에 위배된다"던 정부는 여당의 압박에 백기투항을 하고 말았다. 조세의 기본적인 원칙이 불과 3일 만에 뒤집힌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이중삼중 세금혜택 땜질처방…고소득자가 자녀공제 더 받는 경우도
정부의 연말정산 보완대책은 그동안 정부가 밝혀왔던 원칙보다는 '땜질식' 처방이 대부분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정부가 2013년 세법개정안에서 자녀세액공제를 줄였던 명분인 '중복지원 축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당시 정부는 영유아 보육료 지원, 자녀장려세제(CTC) 도입 등을 이유로 연말정산에서 출산·입양 공제와 다자녀 공제 등을 축소했다. 하지만 보완대책에서 정부는 셋째자녀에 대한 세액공제를 확대하고, 6세 이하 2자녀 공제와 출산·입양 공제를 부활시켰다.
자녀와 관련된 보완대책은 5500만원 초과 소득자들이 '어부지리'로 세금을 돌려받는 결과로도 이어졌다. 정부의 기본적인 타깃은 5500만원 이하 소득자들이지만, 거꾸로 5500만원 초과 소득자들의 혜택이 더 컸던 것이다. 자녀세액공제와 출산·입양 공제 등 보완대책으로 돌려주게 되는 세금은 모두 957억원이다. 이 가운데 연 소득 5500만원을 초과하는 근로자의 세금 감소액은 57%에 해당하는 544억원에 달한다. 싱글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근로소득세액공제·표준세액공제 확대 또한 조세의 질서를 무너뜨렸다. 이번 연말정산에서 근로소득세액공제와 표준세액공제 인상은 모두 2850억원의 세액이 감면되는 효과를 보였다. 특히 연봉 5500만원 이하 근로자 중 세부담이 늘어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근로소득세액공제 한도와 기준 금액을 지나치게 상향 조정하는 등 무리수를 뒀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금 한푼 안내는 과세미달자 대폭 증가-무늬만 납세자 양산
2013년 세법개정으로 2014년분 연말정산 결과 근로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는 과세미달자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런데 이번 보완대책으로 과세미달자들이 추가로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세금으로 10원을 내는 사람 등 '무늬만 납세자'까지 합하면 사실상의 '과세미달자'가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협소한 세원이 세법 개정과 보완대책으로 더욱 축소됐다. 2013년 근로소득세 과세 대상자는 총 1636만명이었다. 이 가운데 세금을 내지 않은 근로자는 512만명으로 31.3% 달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데 있다. 2014년 근로소득세 과세 대상자는 총 1619만명이다. 8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2014년분 과세미달자 수는 2013년보다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기재부 관계자는 "아직 정확히 추산은 안했지만 연봉 2500만원 이하 근로자 중 납세액이 2013년과 동일한 근로자 372만명은 과세미달자일 가능성이 100%"라며 "2013년보다 세부담이 감소한 486만명의 상당수도 과세미달자가 될 것인 만큼 총 과세미달자 수는 적어도 512만명은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부담이 감소한 486만명 중 200만명만 세금을 안내도 총 과세미달자 수는 572만명이 된다. 비율로 따지면 35%가 넘는다.
성난 민심 달래려고 덜컥 과도하게 보상-세수부족 더 심화
정부의 재정상태로 보면 사실 지금 국민의 세금을 깎아줄 시기가 아니다. 지난해 세금이 정부 예산 대비 10조9000억원이나 덜 들어왔다. 관리 재정수지를 기준으로 한 적자규모는 29조5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2%에 해당된다. 앞으로도 복지지출 등 쓸 곳은 계속 늘어나는데 세금이 늘어날 기미는 없다. 정부가 나라 곳간 사정을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세금을 더 내달라고 요청해야 할 형편이다. 이 와중에 정부는 연말정산에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세금을 총 4227억원이나 깎아줘 버렸다. 앞으로도 매년 이만큼은 세금을 깎아줘야 한다.
정부는 당초 연봉 5500만원 이하인 근로자가 제도 개편으로 세금을 더 냈을 경우 이를 돌려주겠다고 공언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은 205만명, 이들에게 돌려줄 세금 총액은 1639억원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정부가 각종 공제제도를 바꿔 세법을 개편하면서 세금을 돌려주는 사람 수와 금액이 크게 늘어 연소득 5500만원 이하인 근로자 총 513만명에게 3678억원의 세금을 돌려준다. 정부가 애당초 보상 대상에 넣지 않았던 연소득 5500만원 이상인 근로자 28만명도 549억원의 세금을 돌려받는다.
국가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방법은 세 가지다. 꼼수 증세로 세금을 더 걷거나 재정 적자를 늘리거나 정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연말정산 폭탄 괴담만 없었으면 정부가 국민에게 찔끔찔금 돌려줄 돈을 훨씬 더 중요하고 의미 있게 쓸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서민들 챙기다 중산층 불만 폭발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한 중견간부의 경우, 올해 연말정산과 정부의 보완대책을 보고 분통이 터졌다. 그는 "연봉이 7000만원을 조금 넘기 때문에 저소득층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여유 많은 고소득층도 아니다. 아이 학원비와 각종 경조사비, 세금, 국민연금 등 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며 "연봉 5500만원 이하에서 세금을 더 걷었느니 마느니 하는데 진짜 중산층 근로자들은 전혀 고려를 안 하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처럼 중산층에 속한 근로자들 불만이 높아지면서 이번 보완책이 자칫 계층 간 갈등으로 번질 우려가 제기된다. 정부는 보완대책에서 연봉 5500만원까지를 중산층으로 보고 이들의 세부담을 줄여주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5500만원 이하 직장인들 세금은 모두 2013년과 비슷하거나 줄었다. 하지만 상당수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 월급은 정부와 다르다.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 근로자들은 월 515만원(연봉 6180만원) 받는 사람을 중산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가 구분한 소득구간을 응용하면 5500만~7500만원 구간이 실질적 중산층이란 얘기다. 2014년분 연말정산 분석 결과 이 구간 근로자 가운데 무려 62.4%(88만명)가 2013년보다 세금을 더 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