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대북 평화론 강조…'통 큰 제안'보다 '상황관리’
문재인 대통령은 10·4 남북정상선언 1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한반도 구상을 제시했다. 예상대로 '평화'에 굵은 방점이 찍혀 있었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북한의 도발이 수위를 높일 때마다 강한 제재와 압박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남북문제 해결의 또 다른 이정표였던 10·4 정상 선언의 계승을 다짐하는 자리에서는 궁극적 목표인 '평화'라는 가치를 앞세웠다. 26일 오후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기념식 축사에서 문 대통령은 "10·4 정상선언은 남북관계의 기본이 상호존중과 신뢰의 정신임을 분명히 했고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북 정상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다양한 경제협력을 통해 우발적인 무력충돌의 가능성까지 원천적으로 없애고 평화·번영의 길을 남북이 함께 개척하는 담대하고 창의적인 접근에도 뜻을 같이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 '평화·번영의 길' 등의 메시지를 각별히 언급한 것은 10·4 선언 자체가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원칙과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고 이것이 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와 일맥상통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4년 6개월에 걸친 북한과의 줄다리기 끝에 10·4 선언으로 남북문제의 평화적 해결의지를 끌어낸 만큼 기념식에서만큼은 '평화'라는 가치를 먼저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며칠 새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위기가 급격히 고조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의 뉴욕 방문 기간에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전략 폭격기 B-1B 랜서가 북한 동해 국제공역에서 무력시위를 한 데 이어 북한 리용호 외무상은 이를 두고 "자위적 대응권리를 보유할 것"이라고 응수한 상황이다.
미국과 북한이 무력충돌 가능성을 담은 '말폭탄'을 주고받으며 긴장감이 커지는 가운데 문 대통령으로서는 이를 가라앉혀야 할 메시지를 고민했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지금은 국민의 안전과 평화적인 상황관리가 우선"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뉴욕에서 귀국하기 직전 수행 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지금은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북한을 압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며 "선뜻 다른 해법을 모색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과는 '결'이 다소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실무진이 애초 준비한 연설문에는 '통 큰 제안'으로 불릴 만한 내용도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긴장상황을 고려해 이를 평이한 수준으로 다듬은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문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할 때까지 제재의 강도를 높이고 단호하게 압박해야 한다는 데 국제사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며 제재와 압박은 아직 유효한 '카드'라는 점을 분명히 해뒀다. 북한을 향해 대화를 촉구하고 나선 것 만큼이나 눈에 띄는 대목은 국제사회의 역할을 계속 강조한 대목이다.
문 대통령은 "지나치게 긴장을 격화하거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지 않게 국제사회와 협력할 것"이라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국제사회와 함께 북한의 발전을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주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우리 정부의 기조가 국제사회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는 판단에 따라 우회적으로 국제사회에 적극적 역할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과 북한이 연일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국제사회가 양국의 긴장 유발 행위를 만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미 북핵 문제가 단순히 한반도 문제가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문제라는 점을 수차례 지적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 국내적으로는 여야 정치권을 향해 국민의 단합된 힘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고 남북관계가 주춤거릴 때마다 국민의 걱정이 클 것"이라며 "여야 정치권이 정파적 이익을 초월해 단합하고 국민께서 평화라는 오직 하나의 목표로 마음을 모아주시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보라는 공통된 가치로 정부의 대응을 지지해 달라고 하는 동시에 하루 앞으로 다가온 여야 지도부와의 대화에서 정파를 떠나 오직 '국익'의 관점으로 생산적인 논의를 해보자는 뜻을 비친 것으로도 풀이된다. 청와대 초청에 응하지 않은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에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의미도 담겼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에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권병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