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이미 신체는 거의 사라져버리고 얼굴과 심장 정도만 남은 남자. 신경회로를 교체하면서 로봇처럼 행동하게 만들어졌지만, 문득문득 솟구치는 분노, 공포, 편견, 절망, 사랑의 감정은 어쩔 수 없다. 기계에 가깝지만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 로봇.
네덜란드 출신의 폴 버호벤 감독이 미국으로 건너가 만든 '로보캅'(1987)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에이 아이'(2001)까지 이어지는 SF 휴먼 드라마의 전통을 잇는 걸작이었다.
원작에 대한 명성이 워낙 높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추진한다는 소식에 우려를 표명하는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세계 영화계의 재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곳이 바로 할리우드 아닌가.
소니픽쳐스는 '엘리트 스쿼드'(2007)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브라질 출신의 재주꾼 호세 파딜라 감독을 찾아냈고, 파딜라 감독은 2014년 버전의 '로보캅'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하며 투자사의 기대에 부응했다.
'엘리트 스쿼드'에서 경찰들이 마약 소굴을 소탕할 때 볼 수 있었던 속사포 같은 습격 장면들,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 그러면서도 감정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등이 스크린 속에 숨 쉰다. 난해하지 않은 선에서 스타일리시하게 재창조된 '로보캅'은 가뭄 속 단비 같은 블록버스터 수작이다.
범죄와 무질서로 황폐해진 미국의 디트로이트. 암흑가 세력을 추적하던 탁월한 실력을 지닌 경찰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는 조직폭력배와 결탁한 동료의 배신 탓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전국의 경찰들을 로봇으로 교체하려는 야심을 가진 다국적 기업 옴니코프사는 다 죽어가는 머피의 신체에 눈독을 들인다. 기계에 가깝지만 인간의 얼굴을 가진 '로보캅'을 만들면 로봇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옴니코프사의 레이몬드(마이클 키튼) 회장은 프로젝트를 전담한 데넷 노튼(게리 올드먼) 박사를 머피의 부인 클라라(애비 코니쉬)에게 보내 그녀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고, 무적의 능력과 인간의 감성을 지닌 로보캅 프로젝트는 머피의 신체를 통해 마침내 완성된다.
로보캅을 기계로 만드려는 옴니코프사의 무자비한 노력과 거의 기계로 변한 로보캅의 차가운 심장을 뚫고 치솟는 미증유의 인간 의지와 감정이 서로 스미고 섞이면서 영화 전체에 강력한 에너지를 부여한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여럿 있다. 재즈 스탠더드 '플라이 투 더 문'이 흐르는 가운데 수술대에서 깡통 로봇으로 변해가는 머피의 현실과 단란한 가정을 꿈꾸는 그의 상상이 음악과 뒤섞이는 장면, 영화 막판 머피가 옴니코프사로 쳐들어가서 로봇들과 대결하는 액션 시퀀스는 솜털이 곤두서는 영화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특히 반복적으로 불안감을 자극하는 단조로운 사운드는 이런 쾌감을 예고하는 촉매제 역할로서 제격이다. 연기 잘하는 게리 올드먼과 마이클 키튼뿐 아니라 신예 조엘 킨나만의 연기도 주목해서 볼만하다.
미국의 제국주의를 도마에 올려놓고 잘근잘근 비판하는 파딜라 감독의 냉소와 이를 허용하는 할리우드의 열린 자세도 인상적이다. "미국의 안전보다 우선하는 게 어디 있나요"라고 부르짖는 극우 언론인 팻 노박(사무엘 L.잭슨)의 모습은 미국의 일방주의와 오버랩한다.
2월13일 개봉. 12세이상관람가. 상영시간 121분.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2/08 06:00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