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전시 <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 패키지 티켓 오픈
[최혜빈 기자/스포츠닷컴]
예술의전당은 11월 4일(화) 오후 2시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와 전시 <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 패키지 티켓을 오픈한다.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과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중심으로 모던아트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 <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를 약 30% 이상 할인된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는 이번 패키지는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예술의전당이 선보이는 공연과 전시의 최상의 조합이 될 것이다. 문화향유가 많아지는 시기인 11월과 12월에 가장 추천할만한 공연과 전시를 묶은 이번 패키지는 예술의전당 싹티켓(www.sacticket.co.kr)에서 단독으로 판매된다. 공연은 11월 11일(화)부터 12월 7일(일)까지, 전시는 11월 22일(토)부터 12월 31일(수)까지 자유롭게 관람일을 선택할 수 있다. (공연·전시 다른 일자 선택 가능)
공동체, 언어, 소통이란 소재로 빚어낸 매력적인 연극
우리가 침묵 속에서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 New York Times
우리에게 가치 있는 시각을 제시하는 예리하면서도 도발적인 작품, Guardian
예술의전당이 노네임씨어터컴퍼니와 함께 11월 08일(토)부터 12월 14일(일)까지 자유소극장에서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영국의 극작가 니나 레인(Nina Raine)의 작품으로 2010년 영국 Royal Court Theatre에서 초연되며 작품성뿐만 아니라 흥미로운 주제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바 있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예민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으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야기의 틀로 잡고 그 안에 언어와 소통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끌어와 매력을 더했다.
이 작품은 '소통의 근본인 언어에 민감한 가족구성원들이 과연 매일 보게 되는 가족들과의 진짜 소통에도 민감할까'라는 흥미진진한 주제를 관객에게 던진다. 여기에 '수화'라는 제 3의 언어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작품은 가장 본질적인 주제 안으로 힘 있게 내달린다.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하고도 일상적인 관계, 수많은 가치를 '강제적으로' 공유하는 이 관계 안에서 언어라는 최상위의 소통 수단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이 작품을 보는 가장 매력적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국내 초연인 이번 공연은 <예술하는 습관>, <철로>의 박정희 연출을 중심으로 무대디자이너 박동우, 조명디자이너 이동진, 의상디자이너 조상경 등이 참여하였으며, 배우 남명렬, 남기애, 김준원, 방진의, 이재균, 정운선이 무대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를 심도 있게 그려낼 것이다.
2014년 겨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초연하는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Tribes>는 가장 보편적인 주제를 통해 가장 독창적인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새로운 작품에 목마른 국내 관객들의 갈증을 해소하는 작품으로 다가갈 것이다.
줄거리
폐쇄적인 게토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 집이에요.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속해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리끼리만 모여 있기 때문이에요.
정신병자들... 자기들끼리 숨어 사는 공동체.
‘창녀 금지, 장사치 금지, 드보르작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 금지'
그리고 아무도 여길 떠나지도 못하죠.
- 빌리의 대사 中 -
지식, 편견, 논리로 무장한 '언어 밝힘증 환자' 아빠
추리 소설가이자 남다른 공감능력자, 엄마
언어 관련 석사 논문을 준비 중인 우울증 환자, 큰 형
‘글’을 쓰는 일을 하지 않고 오페라 가수를 택한 누나
그리고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청각장애인 막내 빌리까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비난과 비판이 난무하는 논쟁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그들만의 작은 제국. 가족이란 이름아래 누구보다 지적이고, 지나치게 폐쇄적인 가족들이 다시, 한 집에 모였다.
자신들만의 언어와 유머 그리고 규칙들을 가지고 있는 가족 안에서 그들의 방식으로 자라온 빌리는 자신이 청각장애인임을 신경 쓰지 않는 가족들 사이에서 오늘도 침묵하며 이야기를 듣는다. 수화를 배워본 적 없고, 사람들의 입모양을 읽는 것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던 빌리는 청각을 잃어가고 있는 실비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통해서 청각장애인들의 '들을 수 없는 세계'를 접한 빌리는 수화를 배우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실비아를 초대한 저녁식사에서 입모양을 읽지 못하는 실비아와 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가족들을 본 빌리는 그 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멀리한다.
자신이 불편하게 속해있던 '들을 수 있는 세계'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되는 '들을 수 없는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던 빌리는 수화가 아니면 대화하지 않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들을 수 없기에 늘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빌리, 그가 침묵을 깨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왜, 부족(Tribes)인가?
가족이란, 구성원들이 자신의 가치관, 신념, 언어를
아이들에게 넘겨주고 싶어하는 하나의 부족(Tribes)일지도 모른다.
극작가 니나 레인(Nina Raine)은 다큐멘터리에서 곧 태어날 아이가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나길 바란다는 한 청각장애인 부부의 인터뷰를 접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족이란, 그 구성원들이 믿는 것을 전수하고 싶어하는 하나의 부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것을 바탕으로 연극 <Tribes>를 집필하게 된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는 어떻게 태어나든 소속된 공동체의 신념과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대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가족은 들을 수 없는 아들이 '2등 시민', 혹은 '청각장애인 정체성'을 갖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수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수화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그들만의 가장 '올바른' 소신이었던 것이다. 이 '올바른' 소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빌리를 통해 작가는 가족이라는 거대하고도 강력한 '부족'이 아이들 모두에게 자신들의 가치관과 신념, 언어를 전파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필연적으로 한 가족의 구성원일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게 '가족의 가치와 신념에 동의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
부모와 그 조부모, 또 그 윗세대를 이어 내려온 하나의 거대한 신념체계. 그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부족이고 우리는 여기에 속해있는 가족 구성원이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가족의 규칙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개인의 뿌리이자 근간인 가족의 그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사실은 진정한 소통을 방해하는 가족의 편협하고 일방적인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한 빌리처럼 말이다.
한국에서는 원제목에 작가의 의도를 관객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로 공연한다.
우리는 진실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는 언어가 난무하지만 사실은 진실한 소통이 부재한 한 가족을 통해 '듣기'에 대한 의미 있는 고찰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들을 수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심사숙고하게 될 것이다.
들을 수 있는 세계
‘들을 수 있는’ 세계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언어들을 쏟아낸다. 사람들은 종종 소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기 위해’ 대화한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언어와 글쓰기에 특화된 창의적인 이 가족 구성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은유와 비유, 논리와 철학, 비아냥과 직설을 오고가며 자신을 드러내려 애쓴다. 하지만 이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대화들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잘 듣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준다.
들을 수 없는 세계
‘들을 수 없는’ 세계의 구성원들은 자신들만의 강력한 커뮤니티를 구축한다. 이 세계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는 사람이 상위계층이 된다. 그들의 언어는 수화이고 수화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낮은 계층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들을 수 있는 세계’에 속해 마치 ‘들을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던 청각장애인 빌리는 이 세상을 만나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한 그들의 세상으로 빠져들어 간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Tribes>의 무대를 처음 접하는 관객은 다른 작품들과 그 어떤 차별점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 가족의 '집'으로 대변되는 무대 소품들이 독창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무대는 관객들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볼 수 없게 디자인되었다. 관객은 무대 위 모든 상황을 눈으로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완벽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관객들이 최초로 겪는 이질감은 바로 자막이다. 청각장애인 빌리와 그녀의 여자 친구 실비아의 수화 장면은 모두 자막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이 자막이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관객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치되지 않는다. 예상 불가능한 장소에 불현듯 출연하는 자막은 관객에게 고도의 집중력을 하도록 한다. 게다가 수화 장면에서 제공되는 자막은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닷없어서 관객의 혼란을 야기한다. 모든 것이 오픈된 가족의 공간과 소통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막, 그리고 들을 수 없는 빌리를 청각장애인으로 배려하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의 일상적인 행동 등은 '입 모양을 읽는 것만으로 대화를 하는 빌리'의 힘든 삶을 관객에게 오롯이 체험하게 해준다. 빌리가 겪는 진짜 고통을 통해 어쩌면 관객은 너무 일상적이라 외면하고 있는 자신들 가족의 문제를 직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소속감과 소통이 합일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Tribes>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될 수 없는 빌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의 사회 공동체에서 절대로 소외되고 싶지 않은 인간의 사회적 욕망을 조망한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공동체가 그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배타적이고 관성적인 방법으로 관습과 규칙을 행하는지를 목도하게 된다.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한 모든 구성원들의 이러한 '선의'가 폭력으로 변화되는 순간은 공동체의 '선의'와 구성원의 개성이 전혀 맞지 않는 순간에 발생한다. 들을 수 없는 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이 가족의 노력처럼 말이다. 늘 가족들을 따르던 빌리가 비로소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도 늘 소외받던 가족 외에 자신이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청각장애인 공동체)가 있다는 인지에서 비롯된다.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빌리의 강렬한 욕망은 안정적인 공동체에 편입되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내포된 DNA일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 Tribes>는 여기서 더 나아가 유사한 사람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고 해서 결국 완전한 소통을 이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작품에 제시된 '들을 수 있는 세계'와 '들을 수 없는 세계'를 모두 경험하는 실비아의 캐릭터가 겪는 고통은 이 문제가 유사공동체에 소속된다고 해서,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들을 수 있는 세계에 사는 빌리의 가족과 들을 수 없는 세계를 사는 청각장애인 공동체는 그 어떤 교집합도 없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다른 공동체를 잇는 '수화'라는 매개체는 어쩌면 '진짜' 소통의 단초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소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모든 개개인들에게,
이 작품은 결코 명확한 답안지를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을 본 관객들은 비로소 수많은 '잘못된 소통'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최혜빈 기자 chb0508@hanmail.net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스포츠닷컴&추적사건25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