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선 선생은 경기도 고양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사위이다. 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제의 군대 강제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 온 선생은 이동휘가 개성에 세운 사립 보창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신민회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에는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함경북도 성진군에 있는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이동휘의 교육생’이 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이동휘를 따라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만주와 연해주에 세워진 민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위해 헌신하였다.
1920년 2월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과 국무원 비서장으로 임명되어 이동휘와 함께 임시정부와 있는 상해로 왔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 개혁 논의가 한창이었다.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하여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라고 주장하며 화합할 것을 역설하였다.
국민대표회 지지파와 정부 옹호파를 중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결렬되자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1924년 12월 박은식 내각의 법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오영선 선생은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하고 간도지역 정의·신민·참의 3부를 설득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국무령 김구 체제에서 군무장에, 이동녕 체제에서 외무장과 군무장에 임명되어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하여 힘썼다.
임시정부 외곽단체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4년 대한교민단 의사회 학무위원에 선임되어 교민 자제교육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1922년 대한적십자회 이사장과 1925년 회장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또한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1931년 11월 6일 개최된 제23회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병 때문에 회의 참석이 불가능하여 의원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상해에서 병으로 요양하다가 1939년 3월 10일 순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4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