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와 복지, 당정 논의 잘해야
새누리당 지도부가 연이어 '증세없는 복지'에 제동을 걸면서 정부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새누리 지도부가 당장에 증세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증세와 복지 논의를 시작하기로 한 만큼 증세 문제는 당면한 현실로 다가왔다. 정부는 경기가 확실한 회복 단계에 진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인세 등 증세를 한다면 간신히 이어지는 회복의 흐름마저 끊길 우려가 있어 증세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새누리당 새 지도부의 정책 요구를 외면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사태 등에서 증세없는 복지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증세나 복지정책에 대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새누리 지도부 "증세없는 복지 불가능"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새누리당에서 금기시됐던 증세 문제는 연말정산 과정에서 납세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당 핵심 인사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나성린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은 지난달 29일 박원석 정의당 의원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박근혜식 증세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면서 "어떻게 증세를 할지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고 법인세도 조금 인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권 여당 정책위 핵심 관계자가 공개 장소에서 법인세를 포함한 증세 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 과정에서 증세 논의의 공론화를 주장했던 유승민 의원도 경선에서 승리한 지난 2일 "현 정부가 증세 없는 복지라고 한 기조를 바꿀 필요가 있고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 원내대표는 청와대가 "고려 대상이 아니다"고 강조했던 법인세 인상에 대해서도 "법인세, 소득세도 백지에서 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적이 있다.
유 원내대표의 러닝메이트로 정책위의장에 당선된 원유철 의원도 증세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당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에 이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3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며 정치인이 그러한 말로 국민을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밝혔다.
정부, 일단 증세 논란 거리두기
정부는 연말정산 파동이 여당 지도부의 증세 요구로까지 이어지자 증세 논란에 거리를 두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당혹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인천 송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연말정산 환급과 관련한 과도한 걱정 때문에 증세 논의가 불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인세에 대해서는 "야권에서 인상을 주장하고 있지만, 법인세를 세계적으로 낮춰가는 상황인데, 나 홀로 인상했을 경우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밝혀 법인세 세율을 올릴 수 없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하지만 새누리의 신임 원내대표와 정책위의장에 이어 당 대표까지 지도부가 작심한 듯 연이어 정부의 '증세없는 복지'에 제동을 걸자 진의 파악에 나섰다. 일각에선 여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증세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는 상황에서, 정부가 증세 논의를 계속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경제 부처의 한 관계자는 "복지를 축소하거나 복지 수요에 맞게 세금을 올리는 등 무슨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서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필요다고 주장한 법안의 국회 통과와 공무원연금 개혁 등을 위해 여당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현실도 정부가 여당의 증세검토 요구를 마냥 외면하기 어려운 이유로 꼽힌다. 다만, 여당 내부에서도 친박계(친박근혜계)를 중심으로 증세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증세보다는 복지예산에 대한 구조조정이 우선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예측이 나오기도 한다.
당정 간의 갈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커진다. 증세 문제 외에도 전반적인 경제정책에서 엇박자가 발생할 수 있어서다. 특히 유 원내대표는 공개석상에서 '최경환 노믹스'의 핵심 중 하나인 확장적 재정정책에 대해 "효과는 적고 재정건전성만 해칠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더구나 최 부총리가 성장을 우선시하는 반면, 유 원내대표는 복지·고용·노동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리버럴'한 편이어서 정책 조율과정에서 삐걱거릴 수 있다는 관측이나온다. 이 경우 정부가 올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노동·교육·금융·공공 분야의 구조개혁이 탄력을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증세 하거나 복지를 줄이거나'…법인세 인상 가능성 크다
'증세 없는 복지' 기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세금을 늘리거나 복지를 줄이는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조세 저항이 예상되는 증세보다는 복지의 구조조정이 우선시 될 가능성이 크다. 김무성 대표도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복지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 전면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며 "증세는 이 결과를 토대로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없을 때에 국민의 뜻을 물어보고 추진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현재 중복되는 지원 등 복지 부문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복지를 축소하면 혜택을 받는 국민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내년부터 선거를 앞둔 정치권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증세 논의가 본격화될 수도 있다. 증세가 논의가 이뤄진다면 법인세가 핵심 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법인세는 이명박 정부 당시 최고 명목세율이 25%에서 22%로 3%포인트 인하됐지만 기업의 투자 등은 크게 늘어나지 않아 야당 등이 법인세를 원래대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선거를 앞둔 정치권 입장에서는 소득세보다는 법인세 증세가 부담이 덜할 수 있다.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 역시 뜨거운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이 꾸준히 '부자증세'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유 원내대표가 라디오에 출연해 "증세를 한다면 당연히 가진 자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는 증세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