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이석기 내란선동 유죄, 음모 무죄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22일 내란음모·내란선동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에게 징역 9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원심처럼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각각 판단했다. 앞서 이 전 의원은 지하혁명조직 RO의 총책으로서 북한의 대남 혁명론에 동조하면서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구체적 실행 행위를 모의한 혐의로 지난 2013년 9월 구속 기소됐다. 수원지법은 이 전 의원의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판단해 징역 12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이어 서울고법은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보고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으로 감형했다.
대법원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내란을 선동하기는 했지만 모의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하면서 구체적인 내란죄 법리를 제시했다. 사법 역사상 대법원이 내란음모죄와 내란선동죄 법리를 내놓은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22일 대법원은 내란음모죄의 성립 요건에 관해 "개별 범죄행위에 관한 세부적인 합의가 있을 필요는 없으나 공격의 대상과 목표가 설정돼 있고 실행 계획에 있어 주요 사항의 윤곽을 공통적으로 인식할 정도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어 "내란음모죄에 해당하는 합의가 있다고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내란에 관한 범죄 결심을 외부에 표시·전달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며 "객관적 내란범죄의 실행을 위한 합의라는 것이 명백히 인정되고 그런 합의에 실질적 위험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특히 "특정 범죄와 관련해 단순히 의견을 교환한 경우까지 모두 범죄 실행의 합의가 있는 것으로 보면 음모죄 성립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돼 국민의 기본권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란선동죄의 성립 요건에 관해선 "내란 실행의 목표를 갖고 있다고 해도 단순히 특정한 정치적 사상이나 추상적인 원리를 옹호하거나 교시하는 것만으로는 내란선동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어떤 표현 행위가 내란선동에 해당하는지는 선동 행위 당시의 객관적 상황, 발언 등의 장소와 기회, 표현 방식과 전체적 맥락을 종합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다만 "내란선동에 있어 시기, 장소, 대상, 방식, 역할분담 등 주요 내용이 선동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돼야 하는 것은 아니고, 선동 당하는 사람이 실행 행위를 할 개연성이 인정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내란음모죄는 형법에 규정돼 있다. 형법 87조는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를 내란죄로 처벌하도록 했다. 또 90조 1항은 '87조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음모한 자'를 징역 3년 이상의 유기징역 등에 처하도록 했다. 앞서 내란음모죄가 적용된 사건은 1974년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이다.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돼 유의미한 판례가 남지 않았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날 판결에 관해 "대법원이 사실상 최초로 형법상 내란선동죄와 내란음모죄의 성립요건 등을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대법원-헌재 다른 판단 논란 불가피
대법원이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리면서 대법원은 물론 헌법재판소를 포함한 사법부 전체가 또다시 논란에 휩싸이게 됐다. 같은 사건을 두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단에 차이가 있어서다. 대법원은 22일 이 전 의원 등 피고인 7명에 대한 상고심에서 원심과 같이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내란선동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했다. 실체를 두고 논란이 계속됐던 '지하 혁명조직(RO)'에 대해서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만큼 존재가 엄격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법조계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 지난 해 연말 내려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과 일부 상충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의 배경에는 RO의 실체를 인정하는 듯한 헌재의 판단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 전 의원의 '내란선동 행위'를 '통합진보당의 행위'로 보기 위해서는 RO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 모 지방국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가 성급했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사실관계를 확정하는 것은 결국 대법원의 몫인 만큼 헌재가 확정된 사실을 근거로 판단을 내렸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견법조인인 변호사 B씨(54) 역시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결론적으로 두 최고법원인 헌재와 대법원이 사실관계에 대해 다른 판단을 한 셈"이라면서 "헌재가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을 빌미를 주고 말았다"고 아쉬워 했다. 그럼에도, 법조계는 "설령 대법원 확정판결 뒤에 헌재의 판단이 나왔더라도 결국 해산결정이 나왔을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비슷한 입장을 내놓고 있다. 사실관계에 있어 일부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정당해산 심판과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재판은 법률적 요건이나 판단근거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인호 교수(53)는 "반드시 RO의 실체나 내란음모 행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정당해산 결정이 내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성급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야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해산 결정이 잘못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내란음모가 무죄라고 해도 내란선동 행위가 존재했고 그 행위가 상당수 통진당원들에게 용인되고 받아들여졌으며, 적어도 정당조직의 외연을 띄고 있었다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이와 관련해 검사출신의 한 변호사(49)는 "헌재와 대법원이 사실관계에 있어 다른 판단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사실관계 판단은 대법원의 권한"이라면서 "법리적 판단은 차지하고서라도 정치적 논란은 피하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