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급락비상, 한국경제 디플레 우려 예의주시
국제유가 급락-“6월쯤 배럴당 20달러 이하 급락 추정"
국제 유가가 심리적 지지선인 배럴당 50달러마저 흔들리면서 추락세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주요 경제권의 경기 침체 때문에 수요가 제한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는 데도 산유국들이 생산을 줄일 신호를 보이지 않아 당분간 공급 과잉에 따른 하락세는 꺾이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불과 6개월 전 가격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서부텍사스산 원유(WTI)와 브렌트유 가격의 급락은 올 6월쯤 국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 밑으로 떨어질 것이란 투자업계의 성급한 베팅까지 끌어내고 있다.
경제·금융 전문사이트 마켓워치는 원유 투자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올 6월에 원유를 20달러에 팔 수 있는 풋옵션 권리에 투자자들이 베팅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애덤 롱슨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는 “원유 가격 반등을 위한 펀더멘털 개선을 가까운 시기에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WSJ는 두 기준 유가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애널리스트들이 유가가 배럴당 50달러를 상회하는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란 긍정론을 펼치고 있다고 전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중 석유 생산량이 가장 적은 에콰도르가 유가 하락을 이유로 올해 예산을 약 4% 감축한 349억 달러로 책정한 것이 유가를 가늠할 좋은 지표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예산은 올해 평균 유가를 배럴당 79.70달러로 산정했다.
또 미국의 기네스앳킨슨에셋매니지먼트는 “향후 8주간 국제 유가가 배럴당 40달러 아래로 떨어질 수 있으나 연말까지 다시 80달러로 반등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다만 이 회사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움직임을 가장 큰 동인으로 꼽았다. 최근 유가 하락을 압박해온 사우디는 ‘오일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되길 꿈꾸며 내심 유가 하락을 즐기고 있다. 지난해 11월 OPEC 회의에선 ‘감산 반대’를 관철했다.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업체를 포함한 다른 경쟁자들을 힘들게 해 도태시키겠다는 전략 때문이다.
미국계 투자사인 러셀인베스트먼트는 “미국의 대다수 셰일오일 시추 작업은 배럴당 60달러선이 손익분기점”이라며 이 같은 전략이 먹힐 것으로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OPEC의 감산 결정 등 원유 가격을 상승세로 돌려놓는 결정적 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유가 하락은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일본, 유럽 등의 경기가 좋지 않은 데다 유로화 약세가 원유 수요를 줄이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유로존 디플레 진입 ‘초읽기’-글로벌금융 출렁
유로존의 디플레이션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국제유가가 새해 들어서도 연일 급락하면서 글로벌 경기에 대한 우려를 자극하고 있다. 그리스는 주변국들에 채무 탕감을 요구하며 ‘유로존 탈퇴’ 카드를 또다시 꺼내들 분위기다. 원자재값 하락, 경기 둔화의 역풍을 맞은 신흥국에서는 자본 이탈이 가시화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런 시장 불안요인이 올해 내내 지속될 것으로 보고 모니터링을 강화할 방침이다. 6일 국내 증시는 개장과 함께 1,900 선이 무너진 뒤 점점 낙폭을 키워 전날보다 33.30포인트(―1.74%) 내린 1,882.45로 마감됐다. 지난 한 달간 100포인트 이상이 빠진 코스피는 2013년 8월 이후 16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날 일본 증시도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엔화 가치가 상승하면서 3% 넘게 급락했다. 반면 불안심리 확산으로 안전자산인 금과 채권의 가격은 상승했다.
이날 아시아 금융시장의 불안은 전날 국제유가 하락에 따라 미국 증시가 급락(―1.86%)한 영향이 컸다. 5일(현지 시간) 2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2.65달러(5.02%) 떨어진 배럴당 50.04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장중 한때에는 2009년 4월 이후 처음 50달러 밑에서 거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유가 하락은 글로벌 경기 둔화를 상징하며, 유럽 일본 등 취약지역의 경기흐름을 악화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킨 것이다.
당장 유럽만 해도 경기부진에 유가 급락이 더해지면서 앞으로 한두 달 내에 디플레이션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한 상황이다. 새해 첫 달 물가상승률이 0%대도 아닌, 마이너스(―)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다. 그나마 사정이 낫다는 독일도 작년 12월 물가상승률이 0.1%로 최근 5년 새 최저치로 떨어졌다. 김위대 국제금융센터 유럽팀장은 “내수가 가장 견고한 독일마저 물가상승률이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것은 유럽 전역의 디플레이션 진입 압력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라며 “아마 이달부터 유럽 물가는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하락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유럽의 대표적 ‘문제 국가’인 그리스가 다시 골칫덩이로 떠올랐다. 자국내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급진 포퓰리즘 정당(시리자당)이 이달 총선에서 집권이 유력해지면서 유로존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시리자당이 집권에 성공하고 유럽연합(EU)과의 부채 감축 협상이 틀어지면 실제 그리스가 유로존 탈퇴를 강행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그리스 문제는 올 상반기 내내 세계 금융시장의 스트레스 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美기업 실적발표 12일까지 외국인자금 이탈 이어질듯▼
올해는 특히 미국의 금리인상이 예고돼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 시장의 투자심리가 정치적·국지적 리스크에 민감하게 반응할 소지가 크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 돈을 거둬들이면서 국제 시장의 돈의 흐름이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는 상황”이라며 “올해에는 글로벌 금융시장이 내내 안정을 못 찾고 갈팡질팡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 신흥국에서는 최근 1, 2주 동안 시장 불안감이 커지면서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국가부도 확률)이 오르고, 통화가치가 급락하는 현상이 재연됐다. 앞으로도 그리스 위기뿐 아니라 러시아 경제위기, 중국 경기 둔화 등의 요인이 주기적으로 불거지며 글로벌 경제의 숨통을 조일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증권가에서는 코스피가 1,850 선까지 밀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박정우 삼성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4분기(10∼12월) 미국과 유럽의 기업 실적이 하향 조정되는데도 주가가 올랐던 것에 대한 부담감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며 “특히 미국 기업의 실적 발표가 시작되는 12일까지는 외국인들이 몸을 사리고 자금을 빼는 현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유로존의 붕괴나 글로벌 경제의 디플레이션 고착화 같은 최악의 상황이 단기간 내에 현실화되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 위기는 2012년에도 별 탈 없이 넘어간 전례가 있고, 유가 하락도 일부 산유국을 제외하면 세계 경제에 기본적으로 플러스 요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경제 영향은? -低유가 반갑지만, 마냥 웃을 순 없어
국제 유가가 50달러 선까지 떨어지면서 유가 하락이 한국 경제에 끼치는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유가 하락이 기본적으로 한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저(低)유가가 장기화되면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압력이 높아질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지난달 국내 소비자물가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0.8% 오르는 데 그쳐, 15년 3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유가 하락 영향이 크다. 한국은행은 국제 유가가 10% 떨어질 때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2%포인트 떨어진다고 추산한다. 유가가 계속 떨어지면 물가 하락세가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는 유가 하락의 긍정적 면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6일 기자들과 만나 "석유를 전량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유가 하락이 호재"라고 말했다. 유가가 30% 하락하면 가구당 연간 유류비가 50만원가량 절감되는 등 움츠러든 소비를 진작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플러스(+)라는 점을 근거로, 디플레이션 국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물가가 장기 고착화되면, 경제주체들이 소비와 투자를 계속 뒤로 미루는 경향이 나타나고,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단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경제 전체가 축소돼 흐름을 반전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김성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40~50달러대 유가가 수년간 지속되면 디플레이션 압력은 세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한 유럽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글로벌 저성장을 심화시켜 디플레이션 우려를 키울 수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게 되면 유로화 약세를 가속화해 세계경제가 충격을 받을 수 있다"며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쪽 자금 이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맑은샘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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