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원가)와 상관없는 독과점 도둑들-정부는 멍멍일 수밖에 없어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지난 1일 새해 일정으로 인천항을 찾아 "유가가 30% 내려가면 가구당 연간 유류비가 50만원 절감되는 등 우리 경제에 호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분석이 현실화되려면 기업들이 원가 부담이 내려간 만큼 제품 가격을 내려야 한다. 그러면 소비 여력이 생겨서 1개를 사던 사람이 2개를 사거나, 그동안 가격이 비싸서 사지 못하던 제품을 구입하면서 내수가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유가가 내려갈 때 이를 제품 가격에 반영하지 않고, 이윤으로 흡수해버리는 바람에 거시경제 선순환 구조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원유 가격 내려도 소비자 물가는 상승
한국은행의 산업연관표를 보면 유가 하락은 연쇄 작용을 통해 생활용품 가격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등산복을 만들 때는 '원유→석유제품→기초유기화학물질→화학섬유→섬유직물→등산복' 경로를 거친다. 원유 가격이 내려가면 석유 제품 가격이 내려가고 이를 주원료로 하는 기초유기화학물질 가격이 내려가는 등의 경로를 거쳐서 등산복 가격도 내려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원유 가격이 반 토막 났음에도 지난해 11월 기준 경로별 생산자 가격 등락률은 석유제품(-18.4%), 기초유기화학물질(-14.5%), 화학섬유(-7.8%), 섬유직물(-0.9%)의 흐름을 나타냈다. 이후 유통 경로 등을 거치면서 11월 등산복의 소비자 가격은 1년 전보다 4% 올랐다. 가장 기본이 되는 원가 부담이 내려갔는데 최종 소비자 품목의 물가는 오른 것이다.
또 자동차 부품이 나오기까지 '원유→석유제품→기초유기화학물질→합성수지→플라스틱→자동차 부품'으로 연결되는데, 합성수지와 플라스틱 가격 하락률이 -4.6%와 -0.3%에 그치면서 최종 단계의 자동차 수리비 소비자 가격은 0.6% 올랐다. 원유 가격이 생활용품 가격을 내리고, 가계 소비 여력을 확대하는 연결고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석유제품 투입 비중이 높은 상위 40개 품목의 생산자 가격을 조사한 결과 지난해 11월 기준 비료·농약, 도자기, 전력·에너지, 온수, 비누·화장품 등 20개 품목의 가격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유가 내려가면 이익률 개선
이에 대해 기업들은 어떤 품목이건 석유제품뿐 아니라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고 인건비 등 다른 비용 부담 요인까지 감안하면, 유가 하락이 곧바로 제품 가격 하락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업 이익률 추이는 이런 기업들의 항변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연초를 기준으로 2009년 두바이유 가격은 42.88달러로 2008년 91.54달러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유가가 급락한 것이다.
이때 석유 투입 비중이 높은 업종의 영업이익률 변화를 보면 전기가스업(2008년 -1.07%→4.1%), 섬유(2.75%→4.18%), 화학(6.25%→8.77%), 페인트(4.93%→8.04%) 등으로 대부분 크게 개선됐다. 글로벌 위기 영향으로 다른 업종은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유독 석유 투입 비중이 높은 업종만 이익률이 개선된 것이다.
이런 흐름은 계속 유가가 낮은 수준을 유지하던 2010년까지 이어진 후 2011년에 꺾이게 된다. 운수업 영업이익률의 경우 6.5%에서 3.12%로 반 토막 났다. 이때 유가가 오름세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반면 유가가 2012년보다 낮았던 2013년엔 영업이익률이 올라갔다. 국책연구원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원가 부담이 내려간 만큼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서 추가 이익을 누렸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은 유가가 올라갈 때는 제품 가격을 충분히 인상시켜 이익률이 크게 악화되는 것을 막았다. 2012년의 경우 국제 유가는 불과 4.9% 올랐을 뿐인데, 석유제품(5.4%), 섬유(2.1%), 페인트(2.9%) 등의 생산자 물가는 상대적으로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이런 기업들의 행태 때문에 유가가 올라갈 때 소비자들은 물가 상승으로 고통을 받고, 반대로 유가가 내려갈 때는 기업 원가 부담이 내려간 만큼 제품 가격이 내려가지 않아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유가 하락이 제품 가격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주요 업종의 시장이 독과점화돼 있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기업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맑은샘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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