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그래도 따뜻하다
올해 연말에도 신분을 숨기고 선행을 베푸는 ‘얼굴 없는 천사’들이 어김없이 나타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녹이고 있다. 이들은 거액의 수표나 한 무더기 동전, 연탄, 쌀 등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고 있다.
부산 해운대구 반송2동 주민센터에 지난 23일 오후 1시30분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왜소한 체격의 남성이 찾아와 종이상자 2개를 놓고 사라졌다. 상자 안에는 “구겨지고 녹슬고 때 묻은 돈 좋은 곳에 쓸 수 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라고 적힌 쪽지와 함께 10∼500원짜리 동전 1만1746개(115만5340원)가 들어 있었다. 이 남성은 9년 전부터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동전 뭉치를 가져왔다.
같은 날 대구에는 ‘키다리 아저씨’가 올해도 나타나 1억2500만원을 내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60대 남성은 23일 오후 5시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하고 싶다”는 전화를 걸었고, 약속 장소에 나온 직원에게 수표 2장(1억원과 2500만원)과 편지가 들어있는 봉투를 건넸다.
편지에는 “매달 500만원씩 적금을 넣어 모은 돈입니다. 나한테는 소중하고 귀한 돈입니다. 꼭 필요한 곳에 사용해 주길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남성은 이번을 포함해 지난 3년간 4억7200만원을 기부했다. 11년 동안 익명으로 4억원 상당의 쌀을 기부했던 원조 ‘키다리 아저씨’가 올해 초 96세로 세상을 떠난 후 또 다른 키다리 아저씨가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지난 22일에는 80대 남성이 부산 동구 부산역 구세군 자선냄비에 “매일 1000원씩 1년간 모은 돈”이라고 적힌 메모지와 36만5000원이 든 봉투를 넣고 떠났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매년 같은 금액을 기부하고 있다.
서울 명동의 얼굴 없는 천사도 올해 어김없이 찾아왔다. ‘신월동 주민’이라고만 밝힌 이 60대 남성은 지난 14일 1억원짜리 수표와 편지가 적힌 봉투를 넣고 조용히 사라졌다. 이 기부자는 4년째 매년 1억원씩 기부하고 있다.
쌀과 연탄 등을 기부하는 천사도 전국 곳곳에 나타났다. 부산 동구 초량6동 주민센터에는 23일 한 기부자가 10㎏짜리 쌀 100포대와 함께 ‘빈자일등’(貧者一燈·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하나)이라는 사자성어가 적힌 메모지만 놓고 떠났다.
지난 22일 충북 제천시청 사회복지과에는 한 남성이 장락동에 연탄 2만장(900만원 상당)을 보관하고 있다는 보관증 전해주고 “심부름만 하는 것”이라는 말만 남긴 채 자리를 떴다. 12년째 매년 12월 20일을 전후해 나타나는 천사다. 전북 완주군에서는 24일 새벽 한 기부자가 용진면 면사무소 민원실 앞에 20㎏짜리 백미 30포대를 놓고 갔다. 2008년부터 7년째 이어져온 선행이다.
권맑은샘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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