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 통진당, 국민이 위임한 선고를 卒로 본다
통진당, 새정당 설립 암중모색중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라 해산된 통합진보당 소속 인사들이 지도부와 핵심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 물밑작업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진보계 인사와의 접촉면을 늘리고, 국회의원직 상실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준비하며 원내 복귀를 위한 잰걸음을 놓고 있다. 법적 제약을 피해 정치활동을 지속하며 어떻게든 제도권 내로 돌아오겠다는 전략이다.
김미희 전 의원은 22일 평화방송 라디오에 나와 “국민이 4년 동안 열심히 일하라고 뽑아줬는데 임기를 못 채운 상태에서 강제로 (의원직이) 박탈됐기 때문에 국민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새로운 정당 설립에 대해 “지금 당장 논의하는 문제는 아니지만 길게 봐야 할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국민 기대를 충족하는 건 국회의원으로서의 임무를 변함없이 열심히 실현해나가는 것”이라며 정치활동 지속 의사를 거듭 밝혔다.
앞서 이상규 전 의원도 지난 19일 헌재 결정 직후 기자회견에서 “지금 각계각층 민주양심 인사와 (신당 창당을) 의논 중이다. 계속 발전시켜서 진보정치가 새롭게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대체정당, 유사정당은 법적으로 금지되기 때문에 법적 검토를 면밀히 거쳐 진보정당을 다시 만드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방향을 추구할 것”이라고도 했다.
오병윤 전 원내대표와 이정희 전 대표는 이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신부, 김성근 목사 등 진보 인사들이 참여한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원탁회의’에 참석했다. 원탁회의는 가칭 ‘민주쟁취국민운동’ 조직을 결성키로 뜻을 모으고 조만간 회의를 열어 실무단을 구성키로 했다.
현행법상 통진당의 기존 당원들이 비슷한 당명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정당법 41조 2항은 해산된 정당이 같은 명칭을 쓰지 못하도록 제한하고 있지만 유사 명칭에 관한 규정은 없다. 비슷한 이름의 당명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신당 강령이 통진당과 유사할 경우 정당등록 신청이 각하될 수 있지만 강령에서 ‘진보적 민주주의’ 등 일부 표현을 수정할 경우 논쟁의 여지가 생긴다.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통진당 전 의원들은 지역구를 찾아가 주민 접촉 활동도 벌였다. 진보 진영이 재편될 경우를 대비해 언제든 다시 원내로 진출할 교두보를 다져놓겠다는 시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당장 내년 4월 보궐선거에 출마 가능한 통진당 전 의원들의 피선거권을 일정 기간 제한하는 법 개정을 추진키로 했다.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의원직을 상실한 통진당 의원이 현행법상으로는 (보선 등에) 출마가 가능하다”며
“이 문제와 관련해 당에서 법안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영석 원내대변인도 MBC 라디오에 나와 “(통진당 전 의원들이) 다시 (보선에) 출마하는 것도 허용돼선 안 된다”고 했다. 김진태 이노근 의원은 이미 헌재가 해산 결정을 내린 정당의 당원인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지방자치단체장은 해산 결정일 이후 일정 기간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 통진당은 결국 北 사회주의 지향"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찬성한 재판관 8명 가운데 안창호·조용호 두 재판관은 다른 재판관 6명의 결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내용의 '보충 의견'을 결정문 말미에 남겼다. 약 20쪽 분량의 보충 의견은 통진당 주도 세력이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말하지만 본질은 이것 아니냐'(?淫邪遁·피음사둔)면서 다수 의견의 논거를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두 재판관은 통진당의 '연방제 통일'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통진당의 통일 방안은 남북 총투표로 이른바 '코리아연방공화국'이라는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투표를 거치기 때문에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충 의견은 '국민'이 국민 전체가 아니라는 데 주목한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은 먼저 남한에 민중체제의 '자주적 민주정부'가 수립될 것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보수 세력과 보수 정당 등을 배제하는 정권이어서 결국 국민 전체가 아닌 '민중'만이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방제 통일 방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주장했고, 6·15 남북 공동선언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어서 통진당이 연방국가를 주장했다고 해도 헌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보충 의견은 양자는 분명히 다르다고 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일 방안은 2단계인 연방국가 진입을 위해 먼저 북한에서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제도를 받아들일 것을 전제로 한다. 6·15 남북 공동선언도 통일 후 지향하는 체제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반면 통진당의 연방제는 통일이 체제 변혁을 위한 수단이고, 결국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라서 합헌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협소한 '민중' 개념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듯, 통진당은 '민중주권주의'는 소수 특권계급의 특권을 타파해 민중의 주권을 실질화하자는 것으로 국민주권주의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충 의견은 "주권이 민중에게 있다면 국가는 민중에 적대적인 계급을 억압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며 "통진당 주도 세력이 주장하는 것은 '민중독재'"라고 평가했다.
보충 의견은 이 밖에 진보적 민주주의는 그 실질이 자유민주주의 개혁이 아니라 북한식 사회주의로의 변혁임을 지적하고, 과거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적 강령을 바꾼 배경에도 북한의 지침이라는 '숨겨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표시했다. 두 재판관은 통진당의 이런 위장전술을 조목조목 지적한 뒤 "자유민주주의의 존립 자체를 붕괴시키는 행위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무한정 허용할 수는 없다"며 "통진당 주도 세력의 대역(大逆·국가와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죄) 행위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용서하지 않음)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맺었다.
검찰, 해산된 통진당 '주도세력' 30여명 수사 검토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소속 당원들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고발 사건 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헌법재판소가 북한 추종 세력으로 꼽은 통진당 '주도 세력'을 우선 수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22일 알려졌다. 앞서 보수 단체들은 "헌재가 통진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위헌(違憲) 정당'으로 보고 해산을 결정한 만큼 당원들도 처벌 대상이 된다"며 이정희 전 대표와 당원 전체를 검찰에 고발했다.
이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헌재가 통진당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 해산을 결정했지만 이와 별개로 통진당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단체나 이적 단체에 해당하는지 본격적인 법리 검토에 들어갔다. 검찰은 헌재가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통진당을 장악했다고 밝힌 '주도 세력'을 우선 수사 대상으로 설정하고, 과거 이들이 연루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수사 기록 등을 확보해 검토할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헌재가 통진당 내 주도 세력으로 지목한 경기동부연합, 부산울산연합, 광주전남연합 출신의 중앙당 핵심 간부들이 우선 수사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헌재는 통진당 전직 의원 5명과 당 3역, 최고위원, 진보정책연구원, 교육위원회 등 30여명을 통진당 주도 세력으로 꼽았다. 검찰이 통진당을 반국가단체나 이적단체로 판단하더라도 당원 전체로 수사가 확대되기는 물리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과거 검찰이 반국가 단체나 이적 단체를 수사할 때에도 핵심 주도 세력만 형사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통진당 당원 전체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2012년 통진당 비례대표 부정 경선 때 전국 검찰청이 동시다발적으로 수사에 나섰던 전례에 비춰 수사 자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공산당 해산 이후 당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뒤따랐다. 12만 5000여명에 이르는 공산당 관련자가 수사를 받았고, 이 중 7000명가량이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다. 통진당 당원은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 3만명, 전체 당원 10만명가량으로 알려졌다.
통진당 해산 결정에 유일한 반대 의견을 낸 김이수 재판관은 "다수 의견이 통진당을 북한식 사회주의 목적으로 단정한 것은 통진당 자체를 반국가 단체로, 당원 전체를 반국가 단체 구성원으로, 지지했던 국민을 반국가 단체 지지자로 규정하는 것과 다름없고, 주도 세력에 속한 당원들은 국보법에 의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는 점을 공인해 주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앞서 통진당해산국민운동본부는 이정희 전 대표와 이석기·김재연 등 통진당 소속 전 국회의원 5명과 전체 당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재야 원탁회의 "통진당 부활" 주장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이후 진보진영의 새판 짜기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흐름은 크게 두 갈래다. 구 통진당을 재건하자는 움직임과 기존 정치를 아예 ‘앙시앙 레짐’(구체제)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진용을 갖추자는 움직임이다. 구 통진당 지도부는 재창당을 언급하고 있다. 이상규 전 의원은 22일 “각계각층의 민주 양심 인사와 재창당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사·대체 정당 창당은 불법이지만 강령을 바꾸면 창당도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내년 4월 보궐선거에 의원직을 상실한 전 의원 3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선전할 경우 재창당은 현실화될 수도 있다. 야권의 원로기구인 ‘통합진보당 강제해산 반대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원탁회의’(원탁회의)도 이런 흐름에 힘을 보탰다. 이날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원탁회의 비상회의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함세웅 신부, 김성근 목사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구 통진당에선 이정희 전 대표와 오병윤 전 원내대표 등이 참석했다. 이 전 대표는 엎드려 읍소했다. 그는 “진보정치의 결실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는 사죄의 절”이라며 울먹였다. 그의 호소에 정동익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은 “민주주의의 훼손을 좌시할 수 없다”며 “독재 회귀에 저항할 ‘민주쟁취국민운동’ 조직을 시급히 결성하자”고 했다. 분위기는 이내 고조됐다.
참석자들은 “종북놀이 마녀사냥에 앞장섰다”며 일부 취재기자와 보수단체 관계자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회의에선 “국정원에 의한 총체적 부정선거의 책임자를 처벌하자” “세월호로 흐지부지된 ‘대통령 퇴진운동’을 전개하자”는 등 대선 불복과 대통령 퇴진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함 신부는 마무리 발언으로 “통진당이 죽었으니 부활하게 하자”며 “독재 유신의 잔당을 타파하는 데 뜻을 같이하는 모든 단체의 연합전선을 만들자”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과 달리 통진당을 배제한 채 새로운 당을 만들자는 논의도 있다. 종교·문화예술·노동계 인사 100여 명이 참여한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새로운 정치세력의 건설을 촉구하는 모임’(국민모임)의 양기환 공동운영위원장은 이날 “기득권 정당은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는 점이 세월호로 확인됐다”며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안 정당은 통진당과는 무관하다. 정치인을 배제한 것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새 정당을 만들자는 의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모임엔 통진당 부활을 주장하는 ‘원탁회의’의 핵심인 함 신부 등도 참여하고 있어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진보진영 인사와 중도 인사가 섞여 있지만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방향을 잡은 쪽도 있다. 주섭일 ‘사회민주주의 포럼’ 공동대표는 “통진당은 동유럽의 공산당과 같은 낡은 극단주의 정당으로 ‘김씨 왕조’를 비판하지 않고 인권에 무관심했다”며 “우리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형태 등 복지를 통해 모순을 완화하는 진보정치를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기표 사회민주당 창당 준비모임 정책팀장도 “북한에 반대하는 입장을 뚜렷하게 하는 진보정당이 목표”라고 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한국 정치에서 진보진영의 최대 지지율은 15% 남짓이지만 종북에 대한 거부감으로 구 통진당과 정의당의 지지율 합계가 5%로 줄어들었다”며 “종북 등 이념이 아닌 정책을 내세운 진보정당이 나타날 경우 파괴력을 보일 여지가 있다”고 전망했다.
법조계, “의원직 잃은 통진당 5명의<헌재 상대 소송>은 초법적 발상”
해산된 통합진보당 소속 전 의원 5명이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지만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 헌재 결정 자체가 행정소송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헌재는 지난 19일 통진당 해산을 결정하면서 소속 의원 5명의 의원직 상실도 함께 선고했다. 헌법과 헌법재판소법, 공직선거법 등에 해산된 정당 의원들이 의원직을 상실하는지에 대한 명시적 규정은 없다. 통진당은 “의원직을 박탈하려면 최소한 명문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23일 국가를 상대로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국회의원 지위확인 소송’을 동시에 낼 계획이다.
그러나 행정소송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법조계는 보고 있다. 행정소송법은 행정청의 처분을 소송대상으로 삼는다. 헌재 결정은 사법기관의 판단이지 행정청의 처분이 아니다. 수도권의 한 판사는 22일 “법원 판결에 대해 행정소송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면 된다”며 “소송이 제기돼도 각하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본안을 판단하기 전에 소송 자체가 부적법하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다 소송 내용만 놓고 봐도 인용되기 어렵다는 관측이 많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명시적 규정이 없다 하더라도 정당해산 규정 속에 의원직 상실에 대한 부분이 내포돼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위헌정당을 해산시키면서 얻으려는 법적 효과를 고려할 때 의원직을 그대로 두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법조계 관계자는 “통진당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아마 알고 있을 것”이라며 “흩어진 조직을 정비하고 구심점을 마련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읽힌다”고 분석했다.
권맑은샘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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