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경제 디플레이션 우려
우리나라 작년 물가상승률이 IMF시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앞으로 대만이 겪은 장기 디스인플레(저물가) 혹은 일본과 같은 장기 디플레(물가하락) 상태에 진입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새해 한국경제는 어떻게 될까? 물가가 낮아진 원인과 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디스인플레, 혹은 디플레 상황을 예측해보고 위기에 대응할 방법은 없는가?
한국경제, 낮은 물가의 원인
최근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 2013년을 기준으로 미국은 1.5%, 유럽 1.9%, 영국이 2.6%의 물가상승률을 보인 가운데 한국은 1.3%를 기록했다. 한국경제의 낮은 물가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바로 내수부진과 수입물가 하락이다. 제조업의 경우 임금상승으로 생산비용 자체는 오르고 있지만, 어려운 경기 때문에 가격상승 단계로 쉽게 넘기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안정적인 원자재가격과 원화의 강세로 수입물가가 하락했는데, 이점도 물가상승을 둔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분석이다.
‘대만식 장기 디스인플레’ 혹은 ‘일본식 장기 디플레’ 발생 우려
전문가들은 한국의 낮은 물가상승률이 계속될 경우 일본식 장기 디플레나 대만식 장기 디스인플레가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두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선 일본의 경우 1990년대 디스인플레이션 시기를 거친 후 디플레이션을 겪었다. 1991~2004년 동안 전국 도시지역의 땅값이 50%나 떨어졌으며, 이후 잠시 회복하는 듯했으나 2009년 이후 다시 디플레이션에 진입했다. 그리고 또 다른 케이스인 대만은 자산시장의 장기 침체기를 거치면서 디스인플레이션 및 디플레이션 단계를 겪게 되었다. 1992~2002년동안 타이페이 지역 부동산가격이 약 20% 떨어졌고, 2001~2003년 디플레이션 이후 지금까지 계속 저물가 경제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은 부동산 버블 축소가 일본에 비해 느리게 진행 중이고, 개방형 경제구조와 정책적 대응 여력을 보았을 때 대만의 ‘저물가 중성장’ 경로를 따라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만과는 조금 다르게 임금상승률이 높게 유지되고 있어 일본식 장기불황에 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우리경제가 전 세계 주요국의 환율전쟁과 커지고 있는 디플레이션 공포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새 경제팀이 들어서고난 후 내수활성화와 구조개혁에 전념하고 있지만 약발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어 자칫 이 같은 외부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 국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환율시장 안정과 구조개혁 등을 위해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환율전쟁 가시화
지난달 23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국제금융센터, 금융권 등에 따르면 일본이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주말 중국 인민은행은 1년 만기 예금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낮춰 2.75%로, 1년 만기 대출금리는 0.4%포인트 내린 5.6%로 각각 조정했다.
중국 중앙은행의 이 같은 결정은 겉으론 부동산시장 둔화와 내수부진 등에 따른 경기침체를 막기 위한 부양 차원에서다. 하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급격한 엔화 약세에 따라 중국의 수출경기가 타격받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달러화 강세, 중국 경기둔화에도 불구하고 중국 위안화는 지난 5월 초 약 2.2% 평가절상(가치상승)됐고 이 같은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금리인하 조치가 경기둔화세를 뚜렷하게 개선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면서도 하방 위험은 어느 정도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의 한연구원은 "(중국은)내년까지 대내외 환경에 따라 1~3차례의 지준율 인하 등 추가 조치가 시행될 것으로 보이지만 온건한 통화정책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을 전망"이라면서 "이번 조치는 국내경기 진작에 주된 목적이 있지만 내년 미국의 금리인상과 연계돼 위안화 환율 등 여타 부문에 간접영향을 미칠 개연성을 배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격화되고 있는 글로벌 환율전쟁 속에서 자국 통화가치의 홀로 상승을 우려, 2년4개월 만에 금리인하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하이투자증권의 한 연구원은 "저렴한 소비재와 중간재를 주력으로 수출하는 중국은 환율 변화의 민감도가 높다. 최근 수출이 부진한 상황 속에서 위안화가 강세를 지속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부딪혀 결과적으로 통화정책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금리인하를 통해 내수부양을 꾀하겠다는 것은 중국 내수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에는 반길 만한 소식이다. 하지만 위안화 가치 하락으로 원자재 등을 주로 수입하는 국내 기업의 경우 공급비용이 싸지겠지만 가뜩이나 저물가에 허덕이고 있는 국내 경제상황에선 물가 추가하락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
기재부가 내년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2.3% 수준으로 예상하고 있고 한은은 2.4%로 전망하고 있지만 자칫 1%대로 낮아질 경우 지난해와 올해에 이어 3년째 '물가 상승률 1%'라는 멍에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주 자산매입 규모 등의 조정을 통해 경기부양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친 것도 현재 0.4% 수준인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을 빠르게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많은 나라들이 저물가의 공포에서 헤어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수의 투자은행(IB)들은 세계 경제회복 부진으로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시점이 내년 3.4분기 또는 내년 하반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실체인가, 유령인가 '엔저 피해'
글로벌 통화전쟁에서 외환당국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엔저다. 국제금융센터가 JP모간, 크레디트스위스 등 14개 IB의 내년 환율전망치를 집계, 평균을 낸 결과 엔화는 내년 3월 달러당 114.93엔, 6월 116.27엔을 각각 기록한 후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 여파로 인해 9월 118.27엔, 내년 말 119.36엔으로의 상승기조를 전망했다. 또 원.달러는 내년 말 달러당 1100원80전을 그리며 대체로 원.엔 동조화를 보일 것으로 예측했다.
IB들 중엔 내년에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고 아베노믹스가 부진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 내년 말 엔저가 달러당 125엔(노무라증권 전망), 128엔(BNP파리바), 125엔(크레디트스위스)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엔저 위기론의 시각에선 과거 경험에서 엔저효과가 한국 수출기업에 미치는 효과가 신발.옷 등 소비재의 경우엔 6개월, 가전.자동차는 2년에 걸쳐 타격이 왔던 만큼 125엔대 시대에 대한 중단기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현재 원.엔 재정환율은 기준선으로 여겨지는 100엔당 1000원 선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다. 일각에선 100엔당 800원대 전망도 내놓고 있으나 지난달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와 일본 내 소비세 인상 연기, 중의원 해산 등의 여파에도 940~950원 박스권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회의에서 "금리정책으로 엔저를 방어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져 엔저 위기론이 한풀 꺾인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기재부 당국자는 "현재로선 시장이 엔화 약세에 대한 우려를 반영, 원.엔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엔화만큼 원화 역시 가치가 낮아지고 있어 당국으로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환은행 외환딜러는 "엔·달러 환율은 원·엔 환율과 연동돼 원·엔이 꾸준히 하락하니까 원·달러는 상승 추세에 있다"고 말했다. 외환딜러들은 원·달러 환율이 1100원에서 1000원 초반까지 하락하는데 1년이 걸렸지만 다시 1100원으로 반등되는 데는 두 달 남짓 걸렸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원·달러 환율 조정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지금 국내 외환시장은 엔·달러 환율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새해도 한국경제는 역시 물가상승률이 물가안정목표치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 것으로 예상된다. 디스인플레이션 장기화에 따른 악영향을 사전에 막고, 내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기준금리를 낮추는 등의 과감한 완화적 통화정책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권맑은샘 기자 kbc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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