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도 블랙리스트의 마수(魔手)에 놀아났
나?, 국민들 큰 충격
대한민국 사법사상 초유의 참담한 일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18대 대선 선거무효소송(2013수18)은 2013년 1월 4일 대표 원고 김필원씨 등 시민 6천여 명이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개표부정 등을 사유로 18대 대선이 무효임을 확인해 달라며 대법원에 제기한 소송이다. 대법원은 6개월(180일) 이내에 처리하게 돼 있는 이 소송을 4년 이상 심리조차 진행하지 않다가 지난해 4월 27일 "대통령이 탄핵돼 법률상 구할 실익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각하 판결한 바 있다. 하지만 원고들이 부당한 판결이라며 2017년 5월 26일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2017재수88)해 놓은 상태이고 심리 진행 상황을 보면 작년 12월 6일부터 재판부는 '쟁점에 관해 논의 중'이었다.
문제의 심각성은 재판을 하고 안하고이거나 재판의 결과가 아니라 재판의 절차, 있을 수 없는 대법원 행정처의 처사 때문이다. 대법원 행정처가 판사들 성향과 동향을 사찰하고 특정 재판에 대해 청와대와 교감한 내용 등이 담긴 문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를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22일 공개해 큰 파문이 일고 있다. 문건들 중에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에 대해 청와대가 '최대 관심 현안'이라며 법원 행정처에 2심 선고 전망을 문의하고, 유죄 선고 이후에는 결과에 대해 큰 불만을 표시하며 '전원합의체' 회부를 요구하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그런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 여부를 다투는 '18대 대선 선거무효소송'(2013수18) 사건을 직접 챙긴 정황을 보여주는 증언도 나와 주목되고 있다. 18대 대선 선거무효소송인단 시민 미디어단장 강동진씨는 24일 "2014년 10월 대법원 민원실에서 대선무효소송 사건(2013수18) 관련 서류 일체를 복사하러 갔다가 담당 직원에게서 '해당 소장이 대법원장 캐비닛에 들어 있어 복사가 불가능하다'는 얘길 들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당시 두 대표(18대 대선 선거무효소송인단 공동대표 김필원, 한영수)가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돼 그 옥바라지를 하느라 생업도 접고 무척 바쁘게 지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14년 10월 중순, 아는 변호사의 부탁으로 18대 대선 선거무효소송 관련 서류 전부를 복사하고자 대법원 민원실을 방문해 열람 및 복사 신청을 하였다. 하지만 30분 남짓 기다려도 담당자가 해당 서류를 찾지 못했다. 그런 뒤 "한 직원이 위층에 올라갔다가 내려와 '지금 서류가 대법원장 캐비닛에 들어 있어서 복사가 어렵다. 내일 다시 올 수 있느냐'고 해서 너무 어이없어 '이게 말이 되냐'며 항의한 적 있다"고 하였다. 당시 담당 두 직원도 '이런 일은 이례적'이라며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1시간가량 기다린 끝에 직원이 대법원장실 캐비닛에서 해당 서류를 가져왔고 강씨는 A4용지 박스 하나 분량의 2부를 복사해 받았다.
그는 18대 대선 선거무효소송 관련 서류 전부를 양승태 대법원장이 자신의 사무실 캐비닛에 보관한 사실에 대해 "자기 캐비닛에 넣어 놓고 아예 재판할 생각도 안한 거다. 재판을 못하게 막기 위함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대법원 열람 및 복사과 담당 직원은 24일 "일반적으로 재판장인 대법관이 결재 중에 있어서 서류 복사가 조금 지연될 수는 있다. 하지만 열람실에서 대법원장실에 기록을 넘기고 가져오는 일은 없다. 그게 일반적 업무처리 기준이다. 아마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잘못 들으신 거 같다"고 말했다. "그 당시 민원인이 '서류가 대법원장실에 있어 복사가 어렵다'고 말한 직원조차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고 하자, "그 당시 근무한 직원이 (지금은) 없어 그 상황은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검찰 공공형사부, '사법부 블랙리스트' 고발사건 맡아
한편,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 수사를 국가정보원 수사팀 소속 부서가 맡게 됐다. 서울중앙지검은 24일 전·현직 대법원장 피고발 사건을 형사1부(부장검사 홍승욱)에서 공공형사수사부(부장검사 김성훈)로 재배당했다고 밝혔다. 공공형사수사부는 국정원 수사팀의 주력 부서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 김명수 대법원장 등 고발사건을 맡고 있었다. 이번 재배당으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대법원 고위 인사들에 대한 수사도 한꺼번에 맡게 됐다. 22일 추가조사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당시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상고법원 등 사법정책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문건을 다수 작성했다.
특히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국정원 댓글 사건 항소심 선고 전후로 청와대(BH)와 교감한 것으로 의심되는 문건도 확인됐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파일로 BH와 여야 각 당, 언론, 법원 내외부 동향과 반응을 파악하고 향후 대응 방안을 검토한 내용이다. 이에 따라 공공형사수사부는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국정원의 개입 여부도 들여다볼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검찰은 "본격적인 수사 착수 상태는 아니며 향후 관련 사건의 진행 추이를 지켜보면서 수사 진행 여부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사법부 신뢰 큰 상처…국민께 깊이 사과"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사법부 구성원 모두를 대표하여 참담한 심정으로 국민들께 말씀드립니다. 이번 일로 인한 국민 여러분의 충격과 분노 그리고 실망감이 어떠한 것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과 관련하여 저희 사법부 구성원들도 실로 커다란 충격과 당혹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나온 문건들의 내용은 대다수의 사법부 구성원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법행정이라는 이름으로 권한 없이 법관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성향에 따라 분류하거나, 재판이 재판 외의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오해받을만한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재판에 있어서 모든 국민은 동등하여야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또 재판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어떠한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원칙을 양보하지 않는, 독립되고 정의로운 법관에 의하여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헌법이 법관에 부여한 사명이고, 그러한 재판이 좋은 재판입니다. 이는 국민 여러분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이번 일이 재판과 사법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고 있음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에 큰 상처를 준 것에 대하여 대법원장으로서 마음 깊이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의 질책을 달게 받겠습니다. 먼저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른 합당한 후속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범위에서 조사결과를 보완하고 공정한 관점에서 조치방향을 논의하여 제시할 수 있는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이번 사안이 여기까지 밝혀졌듯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유사한 사태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제도개선책도 마련하겠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사법행정의 문화와 관행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인적 쇄신 조치를 단행하고, 법원행정처의 조직 개편방안도 마련하겠습니다. 중·장기적으로는 법관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구의 설치를 검토하는 것과 함께 기존 법원행정처의 대외업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법원행정처 상근 판사를 축소해 나가겠습니다. 곧 출범할 예정인 ‘국민과 함께 하는 사법발전위원회’도 이에 관한 국민들의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구성하고, 사법행정 운용방식의 개선책이 우선적으로 검토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사법행정, 재판제도, 법관인사 전반을 점검하여 모든 부분을 사법 선진국 수준의 투명한 시스템으로 대폭 개선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이번 일의 가장 큰 피해자가 결국 국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좋은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고, 좋은 법원과 신뢰할만한 법원을 가질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사법부는 국민 여러분의 이러한 권리를 보다 충실하게 실현하기 위해 2018년을 사법부 혁신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 해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번 일의 처리도 그 과정의 하나로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포츠닷컴 사회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