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투신, 손가락 절단
고(故) 이민호(18)군이 제주 산업체 현장실습 과정에서 사고를 당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경기 안산시 한 산업체 현장에서 실습을 하던 학생이 이번에는 회사 옥상에서 투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학생은 회사 선임으로부터 욕설이 섞인 지적을 받은 뒤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군이 사고를 당한 바로 다음날에는 인천에서 한 실습생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도 있었다. 드러나지 않은 ‘제2, 3의 민호들’이 전국 곳곳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28일 교육부 등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후 6시 10분쯤 안산의 A특성화고 3학년에 재학중인 박모(18)군이 현장 실습을 진행 중이던 이 지역 금속업체 S사 공장 4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박군은 공장 건물 앞에 있던 화물차 위로 추락하면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양쪽 다리와 팔, 머리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먼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상태가 심각해 헬기를 이용해 인근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로 다시 옮겨졌다. 최근 수술을 받은 박군은 의식을 겨우 되찾았지만 인공호흡기에 의존할 정도로 위중한 상태로 전해졌다. 박군은 S사 근무 9일째이던 투신 당일 오후 5시40분쯤 화학약품을 배합하는 기계를 닦던 중 함께 일하던 선임 직원으로부터 심한 욕설을 듣고 언쟁을 벌였고, 이후 담임 선생님과 17분 가량 통화를 한 뒤에 옥상으로 향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박군과 통화를 했던 담임 교사 박모씨는 “같이 일하는 형이 박군에게 ‘왜 일을 설렁설렁 하냐’며 욕설을 했다고 말했다”며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온 다른 직원과 자신을 비교했다고도 말했다”고 전했다. 박 교사는 그러나 “그렇다고 자살을 시도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고 전했다. 사건을 맡고 있는 경기 안산단원경찰서는 박군의 정확한 투신 동기에 대해 조사를 진행 중이다. 경찰 관계자는 “박군이 다행히 의식은 되찾았지만 아직 진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조사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선임 직원은 경찰 조사에서 “이것저것 가르쳐주는 과정이었을 뿐 동생처럼 잘 대해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군이 사고를 당한 바로 다음날에는 인천 식품업체 D사에서 또 다른 고등학생 실습생 박모(18)군이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 학생은 17일 오전 11시20분쯤 고기 자르는 기계에 걸린 고기를 빼내려다 왼손 손가락 3마디에 부상을 입었다. 박군이 재학 중인 G고교 관계자는 “정규직인 고참 직원이 고기를 넣으면 박군이 빼내는 역할을 했었다”며 “사고가 난 적이 없는 업체인데 박군이 손을 깊숙이 넣어 빼내려다 사고가 났다”고 말했다. 이 학생은 사고 당일 수지접합 전문 병원에서 봉합 수술을 받고 현재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초 박군은 본인 전공에 맞춰 전기 관련 업체로 실습을 나갔지만 적응을 하지 못했고 재교육을 받은 후 평소 관심이 있었던 조리 관련 업체로 다시 실습을 나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전대책 없는 실습업체과 관리감독에 무책임한 교육당국
이처럼 ‘제2, 3의 민호들’은 오늘도 현장에서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다. 매년 거르지 않고 현장실습에 나선 고교생이 크게 다치거나 숨지는 사고가 드러나면서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지만, 정작 주목 받지 못하고 묻혀버린 사고들 역시 한 해 수십 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의 ‘특성화 학교 현장실습생 산업재해(산재)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21건의 산재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현장실습에서 사고가 발생한 후 산재 보상보험 신청서를 작성, 산재로 인정받아 처리가 완료된 건만 반영한 수치다. 실습현장에서 경미한 사고의 경우엔 불이익을 우려해 사업체에서 따로 산재를 신청하지 않고 쉬쉬하는 만큼 드러나지 않은 사고는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난 제주 음료공장의 현장실습생이었던 이민호(18)군 역시 사망하기 전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 두 차례 이상 사고가 난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산재 처리 건수가 쌓이면 사업체가 안 좋은 평가를 받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보험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개별 사례를 살펴보면 현장실습생들이 언제든 다칠 수 있는 생산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손이나 발이 기계에 끼어 절단되거나 골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17일 인천 서구에서 손가락을 잘린 박모군 뿐 아니라 울산에서도 지난해와 올해 비슷한 사고가 반복됐다. 김모(19)군은 올해 2월 울산 울주군의 단열재제조 업체에서 철판을 구부리는 절곡 작업을 배우다 지도기술자가 눈을 뗀 사이 오른손이 절곡기에 말려들어가 봉합 수술을 받았다. 김군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라 손 쓸 틈이 없었다”고 전했다. 이보다 앞선 2016년 9월에는 축산물 가공업체에서 이모(당시 18세)군이 고기를 포장하던 중 절단기가 멈춘 줄 알고 손을 넣었다가 왼쪽 중지를 다치기도 했다.
현장실습생의 권리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성화고 재학생과 졸업생 연합체인 특성화고등학생 권리연합회는 이날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현장실습 5대 쟁점과 대안’ 브리핑을 열고 “안전 대책 없는 실습업체와 관리 감독에 무책임했던 교육 당국이 현장실습생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합회는 “특성화고 현장실습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빠져있다”면서 학생 선택형 현장실습 제도의 도입을 요구했다. 원하지 않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산업체 파견 실습, 전공과 무관한 업체로의 파견 등이 이런 사고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연합회는 이밖에도 *현장실습 컨트롤타워 부재 *현장실습생의 학생ㆍ노동자 이중지위 문제 *현장실습 실태 파악 지연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스포츠닷컴 사회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