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물가 비상상황, 정부는 ‘재탕대책’ 뿐
소비자 생활물가가 비상인데 정부대책은 ‘재탕’ 뿐이다. 최순실 사태로 우울한 가운데 경제도 위기다. 경기 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생활물가는 오히려 치솟아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보통 경기가 좋지 않으면 수요도 줄어 물가가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최근에는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와 이상기후에 따른 공급 축소폭이 워낙 컸다. 유가와 환율 상승도 물가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우선 사상 최악의 AI로 공급이 줄며 계란 한 판(30알) 가격이 전통시장에서 1만1,000원까지 치솟았다. 10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지난 9일 기준 계란(특란) 소매가는 수원 지동시장에서 1만1,000원을 기록했다. 계란 한 판 가격은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5,000원대였지만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전국 평균 소매가 역시 9,142원으로 과거 5년 평균(5,668원)보다 61.3% 급등했다.
농산물 가격 오름세도 무섭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남해안에 상륙한 태풍 차바, 잦은 강우 등으로 남해안에서 재배되던 작물 공급이 30%가량 줄었다”고 설명했다. 차바로 인한 농경지 피해는 약 1만3,700㏊로 여의도 면적(290㏊)의 47배에 달했다. 지난해 10월 전국 평균 강수량도 145.3㎜로 평년(50.2㎜)의 3배에 달했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1973년 이래 10월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당근 1㎏(9일 현재)이 6,032원으로 과거 5년 평균(2,696원)보다 2배 이상으로 뛰었고 무 한 개의 가격도 3,072원을 기록해 과거보다 139.2% 급등했다. 이외에 배추 한 포기는 4,279원, 양배추는 5,496원으로 각각 110.5, 108.3% 올랐다.
수산물 역시 수온 상승으로 공급이 줄었다. 기재부 관계자는 “수온 상승, 중국 어선의 조업 확대 등으로 어획량 자체가 줄었다”며 “수산물은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가 사지 않는 경향이 있어 가격이 곧 안정되는데 최근에는 (명절 준비 등으로) 수요가 늘어 값이 오르고 있다”고 해석했다. 9일 기준 갈치 한 마리의 가격은 9,759원으로 과거 5년 평균보다 16.8% 올랐고 물오징어도 3,089원으로 20.3% 상승했다.
그동안 잠잠하던 국제유가가 오르는 것도 생활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9일 기준 서울 주유소 평균 휘발유 가격은 ℓ당 1,613원으로 지난해 최저가였던 1,416원(3월5일)보다 약 14% 올랐다. 70ℓ가 들어가는 쏘나타에 기름을 가득 넣을 경우 지난해에는 9만9,000원이 들었지만 이제는 11만3,000원을 내야 한다. 경유 가격 역시 지난해 ℓ당 1,186원에서 9일 현재 1,403원으로 18% 올랐다. 통계청의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지수 중 휘발유 가격의 증감률은 1.4%(전년 대비)로 2013년 7월(1.7%) 이후 3년5개월 만에 상승세로 돌아섰다. 국제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지난해 9월 원유 감산에 합의한 후 러시아·멕시코 등 비OPEC 산유국도 동참하며 오르고 있다. 지난해 배럴당 40달러대에서 등락을 거듭하던 두바이유는 최근 54달러까지 올랐다.
강달러로 환율이 상승해 수입 가격이 오르는 것도 물가가 뛰는 주된 이유다. 예를 들어 수입업자는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100원일 때는 1달러짜리 물건을 1,100원만 주고 사올 수 있지만 1,200원으로 오르면 더 많은 비용을 내야 해 당연히 국내 소비자가격을 올릴 유인이 생긴다. 지난해 9월 달러당 약 1,107원이던 평균 환율은 12월 1,183원으로 3개월 사이 80원 가까이 올랐고 최근에는 1,200원 내외로 추가 상승했다. 지난해 11월 현재 수입물가지수도 3.6% 올라(전년 대비) 4년3개월 만에 상승 전환했다. 세부적으로 농림수산품 수입물가지수가 6.2% 상승해 약 2년 만에 가장 높았다.
서민애환 달래주는 소주 1병에 5천원
서울 강남역 인근의 G음식점은 최근 곤드레밥과 된장찌개, 소불고기로 구성된 '곤드레 정식' 가격을 8000원에서 9000원으로 인상했다. 업주는 "재료비와 인건비를 감안하면 가격을 더 올렸어야 했지만, 이 정도로 견뎌보기로 했다"고 9일 말했다. 서울 신문로1가에서 하루 치킨 30여마리를 튀겨 판매하는 김모(46)씨는 "임차료가 매년 오르고, 식용유 값도 최근 올라 1마리에 1만8000원을 계속 받아야 할지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몇 달 새 손님이 30% 이상 줄어 '값을 올리면 다른 데 가겠다'는 손님들의 얘기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 김모(24)씨는 "사당동 단골 분식점에서 한 줄에 3000원 하던 김밥이 최근 3300원으로 올랐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통계청이 30여 가지 외식 품목을 대상으로 조사한 지난해 소비자 물가지수는 전년에 비해 2.5%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소비자 물가지수가 1% 오른 것에 비하면 배 이상 상승한 것이다. 지난해 생선회와 소고기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각각 4.3%, 4.1% 올랐다. 중국 음식점의 짜장면과 짬뽕은 같은 기간 2~3% 상승했다. 분식집의 단골 메뉴인 라면과 떡볶이는 3% 오른 것으로 조사됐다. 30여개 품목 가운데 내린 것은 국산 차(-0.1%)밖에 없었다.
연초부터 장바구니 물가가 뛰어오르는 가운데, '외식(外食) 물가'가 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일반 음식점과 고깃집, 횟집, 호프집, 소주방 등 밥집·술집 물가가 급등하며 가뜩이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진 서민들은 한숨만 내쉬고 있다. 서울 종로3가에서 곱창집을 운영하는 고모씨는 "음식 재료는 전부 가격이 올랐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작년 말부터 시작된 주류와 라면, 음료 등의 도미노 가격 인상에 불안해하는 서민들은 "앞으로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녀야 하나"라며 답답해했다. 한 전문가는 "경기가 어려워 누적된 가격 인상분을 메뉴 가격에 반영하지 않은 음식점이 상당수"라며 "올 상반기 중 많은 음식점이 동시다발적으로 음식 가격을 올릴 경우 서민 부담은 매우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CU·GS25·세븐일레븐 등 편의점 3사는 최근 참이슬과 처음처럼(360mL) 등 소주 한 병 가격을 1600원에서 1700원으로 올리고 있다. 정부가 빈 병 회수를 위해 소주병에 부과되는 빈병보증금을 40원에서 100원으로 60원 인상한 것을 핑계로 100원 인상한 것이다. 지난해 11월과 12월에는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가 맥주 값을 각각 6%, 6.3% 인상했다. 서민들이 즐겨 찾는 음식점과 고깃집, 횟집에서 파는 소주와 맥주 가격은 현재 3000~4000원 정도이다. 이미 일부 식당에선 소주·맥주 한 병에 5000원을 받고 있어 식당 술값 연쇄 인상 가능성도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외식 품목 중 특히 소주 가격이 전년 대비 11.7% 올라 상승폭이 가장 컸다. 지난 2000년 소비자 물가지수 품목에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판매하는 소주를 추가해 조사를 시작한 이래 상승률이 가장 높았다. 현재 물가 상승률이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인 2%나 다른 선진국보다 낮다고 하지만, 식료품과 외식 물가 등이 상승하며 소비자들이 체감하는 물가는 상승하고 있다. 경기가 회복되며 물가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경기침체는 지속되는데 구매력까지 나빠져 악순환에 빠지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설 물가 초비상, 정부는 ‘재탕 대책’뿐
한편, 이런 상황인 가운데 정부는 설 연휴(27~30일)를 앞두고 민생안정대책을 내놨지만 최근 치솟고 있는 생활 물가를 잡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계란과 채소 등 농축수산물 물가가 이미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도 정부 대책은 예년과 달라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10일 *설 성수품 공급 확대를 통한 생활물가 안정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영향 최소화 *서민.취약계층 지원 *교통.물류.안전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설 민생안정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상당수 대책이 지난해 발표된 설 대책과 거의 똑같거나 표현만 일부 바뀐 수준이다.
특히 올해 작황부진으로 가격이 급등한 채소.과일의 경우 비축.계약재배물량을 평시 대비 90~170% 확대공급하기로 했는데, 이는 오히려 지난해(3.3배)보다도 규모가 줄어든 것이다. 축산.임산.수산물도 방출 물량에서 일부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었다. 총 2,446개소의 농임협 특판장과 직거래장터에서 설 성수품과 선물세트 등을 10~30% 할인판매하고 공영홈쇼핑 등 온라인몰에서 세일 행사를 하는 것도 예년 대책과 판박이다. 할인율도 10~30%로 예년과 비슷하다.
이미 내놨던 대책을 마치 설 대책인양 새롭게 포장한 것도 있다.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청탁금지법의 여파를 감안해 선물 상한선인 5만원 이하 소포장 실속상품 개발을 추진하고, 직거래.전자상거래 등 유통구조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지난해 9월 법이 시행된 직후 농림축산식품부와 해양수산부가 내놓았던 대책이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공급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계란 관련 대책도 효과가 있을 지 미지수다.
정부는 농협 등이 보유한 물량(2,000만개)과 방역대(AI 발생 농가 3㎞ 이내) 내 반출 제한 물량(2,800만개)을 설 기간 동안 최대한 공급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일일 계란 수요가 평소(4,300만개)보다 23% 가량 많아지는 설 연휴 기간 이 정도 물량으로 공급난을 해결하긴 불가능해 보인다. 경기가 어려운 틈을 타 일부 기업들이 이미 물품 값을 올린 상황에서 정부는 뒤늦게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대책을 내 놓은 꼴이다. 소비자 체감물가를 낮추긴 어려워 보인다.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당장 치솟은 물가 등을 개선하려는 노력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있다.
스포츠닷컴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