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위기인가? 기회인가?”
'갤럭시노트7 단종' 후 첫 삼성 사장단회의 ‘비통’ 그 자체
삼성전자 '갤럭시노트7' 단종 결정 이후 처음 열린 수요 사장단회의에 참석한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들의 분위기는 침통 그 자체였다. 12일 오전 사장단 회의가 열린 삼성 서초사옥에는 새벽부터 취재진 수십 명이 몰렸고 갤럭시노트7과 관련한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사장들은 대부분 걸음을 재촉하며 자리를 피했다. 박상진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사장은 갤럭시노트7 단종 결정에 대한 심경을 묻는 말에 "비통하다"고 짧게 말했다. 1999년 삼성전자 초대 글로벌마케팅실장을 역임한 박 사장은 '삼성'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장충기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사장은 이번 사태로 조직 개편을 앞당길 가능성을 묻는 말에 "잘 모르겠다"고만 답했다. 김현석 삼성전자 CE(소비자가전)부문 VD(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은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제가 드릴 말씀이 없다"며 황급히 차에 올랐다. 정유성 삼성SDS 사장은 회의에서 갤럭시노트7과 관련한 언급은 없었다고 전했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회의를 마친 후 이례적으로 주차장으로 사옥을 빠져나갔다. 이번 사태와 직접 관련된 신종균 삼성전자 IM(IT모바일) 부문장(사장)과 고동진 무선사업부 사장, 조남성 삼성SDI 사장 등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서는 디스크 관련 저서 '백년허리'의 저자인 정선근 서울대 재활의학과 교수가 건강관리 등을 주제로 강연했다.
새누리 정유섭 의원, "배터리 단전지 케이스 곡선값 설계 실패" 지적
한편, 삼성 휴대폰 갤럭시 노트7 배터리 폭발 원인은 당초 삼성이 밝힌 공정상 결함이 아닌 배터리 제조사 삼성 SDI의 설계 문제라는 지적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12일 나왔다. 새누리당 정유섭 의원은 이날 국가기술표준원 현장 조사 보고서, 배터리 제조사인 삼성 SDI와 중국 ATL사의 배터리 관련 인증 시험 성적서 등을 공개하며 갤럭시 노트7 배터리 폭발은 SDI의 배터리 단전지(셀) "파우치(케이스)모서리가 심하게 둥글게 제작되어" 발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터리 단전지는 양극재·분리막·음극재 등을 층층이 쌓아 둘둘 말은 '젤리롤'을 알루미늄 '파우치'에 넣어서 만든다. 여기서 파우치는 알루미늄 평판을 찍어 눌러(프레싱·pressing) 만들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평판 모서리가 일정 정도 둥글게 제작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파우치 모서리와 음극 기재와 간격이 너무 협소해지면, 충전시 젤리롤이 부풀면서 음극 기재가 모서리에 닿아버린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음극 기재가 분리막을 찌르게 되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분리막이 찢어지며, 결국 충전된 음극 합재와 양극 기재가 접촉해 발화하는 일이 생긴다.
정 의원은 "삼성SDI 프레싱 작업 기술력이 ATL사보다 떨어져 모서리가 더 둥글게 제작되는 결과가 생겼다"면서 "케이스 모서리부 설계를 할 때 곡면 정도를 제어해야 했으나 삼성은 발화 문제를 예상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내용은 산업부 국가기술표준원이 지난달 21일 삼성전자 수원 공장을 방문해 CT 사진 촬영 등의 현장 조사를 실시했을 때도 파악한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일 최초 폭발 원인을 설명했을 때는 단전지 설계 결함이 원인이 아니라 단전지 제조 공정상 결함이 원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 의원은 "세계 일류 스마트폰 기업이라 자처하는 삼성이 세계인을 상대로 한 제품을 만들며 설계 문제가 있었다"면서 "출시 후 2달도 안 돼 단종하게 된 갤노트7을 교훈 삼아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만전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재용, '초유의 위기' 정면돌파 의지
한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갤럭시노트7 사태가 몰고온 '초유의 위기'로 시험대에 올랐다. 더욱이 이 부회장은 오는 27일로 예정된 삼성전자 임시 주주총회에서 책임경영의 법적 의무를 지게 되는 사내 등기이사로 선임된다. '등기이사 등판 타이밍'이 공교롭기도 하지만, 이제 상법상 이사로서 이번 사태를 최대한 빨리 수습하고 삼성전자라는 거대기업을 정상화해야 하는 책무를 지게 된 셈이다. 12일 삼성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현재 해외에 체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북미법인 등에서 전략회의에 참석하고 보고를 받는 등 일상 업무를 처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지난달 21일에만 해도 갤럭시노트7을 직접 손에 들고 삼성 서초사옥으로 출근하면서 재판매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갤럭시노트7 교환품에서도 국내외에서 잇따라 발화 사례가 터져 나오자 결국 제품을 출시 발표 54일 만에 단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삼성전자가 미국소비자제품안전위원회(CPSC) 등 주요 국가의 규제 당국이 리콜 등 강제조처에 나서기 전에 사전협의를 통해 제품 판매를 중단하고, 곧바로 단종을 공식화한 데는 이 부회장의 결단도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또 이날 3분기 잠정실적을 정정 공시했다. 영업이익을 7조8천억원에서 5조2천억원으로 2조6천억원이나 줄여 발표한 것이다. 현 단계에서 추산할 수 있는 갤럭시노트7 단종에 따른 직접비용을 전부 반영했다는 것이 삼성 측의 설명이다. 손익 변동사항을 회계기준에 따라 실적에 반영하는 것은 당연히 공시의무에 속하는 것이지만, 삼성전자가 단종 비용을 3분기에 모조리 반영한 것은 다소 의외의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와 관련, 이 부회장은 내년 2월초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에서 발표할 갤럭시S8 신작부터는 '원점에서 재출발해야 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부정적인 요소를 가능한 한 미리 해소하겠다는 전략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사태로 야기된 소비자 불신을 불식시키고 제품 안전도에 대한 보증을 확고히 하는 한편 폴더블 디스플레이(접는 스마트폰) 등 새로운 혁신으로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카드를 꺼내 들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삼성의 이번 위기는 1994년 삼성전자가 애니콜 초기작인 무선전화 15만대를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아놓고 임직원 2천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사른 눈물의 화형식 사태와 종종 비견되기도 한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제품 불량률이 11.8%에 달하자 불량제품 화형식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때와 비교해 삼성전자의 외형과 글로벌 위상이 엄청나게 달라진 점에 비춰 이번 사태의 여파는 훨씬 더 심각하다.
이 부회장으로서는 조기 단종 결정과 손실 반영 등을 통해 '털고 갈 것은 확실하게 털고 가겠다'는 메시지를 사내외와 시장에 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둘러싸고 일각에서는 삼성이 조기 인사를 통해 분위기를 쇄신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삼성 관계자는 "지금은 수습이 최우선인 상황"이라며 "연말 정기인사를 앞당기려는 움직임은 없다"고 전했다. 따라서 현 체제에서 갤럭시노트7 사태가 몰고온 파장을 마무리한 다음 정기인사 시즌에 맞춰 정상적인 평가 이후 신상필벌에 따른 인사를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부회장은 또 삼성전자 분사와 지주회사 전환, 30조원 특별배당, 분할후 사업회사의 나스닥 상장, 독립적인 사외이사 추가 등을 요구한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공세에도 직면해 있다. 지주회사 전환 요구는 삼성 오너일가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측면도 있지만 그외에 특별배당 등은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요구다. 또 엘리엇 측이 추가 공세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가 이달 말 콘퍼런스콜 등을 통해 주주친화정책 등과 관련해 새로운 방안을 제시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스포츠닷컴 편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