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양적완화,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적 저유가 상황으로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글로벌 조선업계 전체가 구조조정의 암흑속으로 진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철강, 에너지 산업 자체가 심각한 국민경제의 암덩어리로 전락해 구조조정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구조조정을 하려면 막대한 유동자금이 필요하고 ‘양적완화’ 논란을 일으킨다.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해야 하지만, 안 해도 할 수 없다’로 요약될 수 있다.
한국판 양적완화는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채권을 인수함으로써 구조조정 재원을 확충해주는 것인데, 이것을 정부가 추진하거나 강제하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뒤흔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경제원리상 중앙은행의 독립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급할 때는 정부가 개입, 돈을 찍는 케인즈식 처방도 가끔 각 자유민주 시장경제 제도의 나라들에서는 단기적으로 써왔던 처방이기는 해서 늘 경제사상, 제도의 논란을 불러왔다.
지난달 말 새누리당이 총선 공약으로 한국판 양적완화를 들고 나오자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당의 선거 공약은 아니라 생각된다”며 강봉균 전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개인적 소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돌렸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의 고유업무라는 판단과 선진경제 원칙상 중앙은행의 독립은 필수요건이라는 가치 때문에 정부가 국민 부담으로 부실기업을 지원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어 정치적 논란을 촉발시킬 가능성도 감안했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총선 뒤 정치권도 곧바로 협의체가 본격 가동되는 등 구조조정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입장을 바꿔 한국판 양적완화가 실행될 경우의 시나리오 검토에 본격 착수했다. 일단 정부는 안이한 운영으로 자기자본비율(BIS)을 깎아먹은 산은과 수은의 인력·조직 개편 및 자회사 정리 등의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요구하면서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적정 규모의 자본확충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로서는 재정을 투입하는 것보다 한은이 새로 돈을 찍어 출자나 채권 인수 등의 형식으로 지원해주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큰 규모의 재정 투입을 위해서는 국회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해 야당의 협조가 필수적인 추가경정예산편성(추경)과 달리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로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29일 국회를 방문한 유 부총리는 “중국 성장률이 5% 이하로 갑자기 뚝 떨어진다든가,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수준으로 가서 수주가 안된다든가, 해외 건설도 하나도 안되고 이러면 경기하강 요인이 될 수 있고 추경이 될 수 있다”면서 “지금은 그런 게 보이진 않고, 조선업 구조조정 때문에 경기가 대폭 침체될 것이라고 판단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유 부총리는 또 “추경이 필요하다면 죽어도 못한다든가 그것은 아니다”면서도 “법을 지켜야 하니까 추경 요건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정부는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그치지 않고 전방위적 산업 구조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위해선 넉넉한 ‘실탄’(유동성) 확보가 필요하다. 정부가 국책은행에 현물·현금을 출자하는 것만으로는 구조개혁 과정에 필요한 재원 확보가 충분치 않을 수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재정과 통화(한국판 양적완화)가 함께 가면 ‘폴리시 믹스’(정책 조합)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서도 “정부 측에서 추진하거나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의 입장은 한마디로 하기는 해야 하는데 반드시 국민동의를 구하며 여야의 합의를 거쳐야하고 ‘중앙은행의 독립’이라는 중요가치를 고려해야 하는 계륵의 상황에 처해있다. 과연 국민경제를 위해 어떤 구조조정 수술이 필요한 것인가? 정치권 여야의 어느 한 쪽 편협한 생각이 아니라 국민의 훌륭한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