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에 잠긴 글로벌 조선·해운·철강·에너지업계
우리나라 뿐만아니라 중국 등 세계 각국이 조선, 해운, 철강 등 과잉공급 업종의 구조조정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조선, 해운, 철강산업 분야는 글로벌 경제의 성장이 둔화하는 반면 경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영국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작년 12월 세계 선박 발주량은 58척, 123만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로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9월(77만CGT) 이후 최저였다. 빚더미에 오른 기업들은 자산을 팔며 버텼지만 이제 생존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해양플랜트에서 천문학적 손실을 냈던 한국 조선사들은 수주 가뭄을 맞았다. 저유가 상황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 해양플랜트의 전망은 암울하기만 하다. 해운사들은 선박을 경쟁적으로 늘렸지만, 물동량은 줄어 운임들이 반 토막 났으며 세계 철강업계 역시 중국의 값싼 철강 제품 밀어내기로 힘겨운 상황이다. 국제유가 급락 속에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도 파산이 급증하는 등 한계에 직면했다.
2000년대 중반이후 세계 1위로 올라섰던 한국 조선업은 2009년 중국에 1위를 내준 이후 호황기 대비 대폭 감소한 물량을 수주하기 위해 중국, 일본과 필사적 경쟁을 벌여왔다. 한·중·일 세나라는 전 세계 선박의 85%가량을 생산하고 있다. 전 세계 경기침체가 지속하면서 선박 발주량은 급감했다. 2015년 들어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올해 1분기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232만CGT로 작년 같은 기간의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문제는 조선업의 불황이 길어지며 발주물량이 씨가 마른 가운데 글로벌 '빅 3'인 우리 조선업체들이 끝 모를 경영난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대형 조선사의 올 1분기 수주량은 8척, 17만1천CGT로 2001년 4분기 이후 15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국은 1분기에 35척, 114만CGT를 수주해 거의 절반을 쓸어담았다. 일본은 7척, 13만3천CGT를 수주하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한국 조선업계의 일감(수주잔량)도 12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클락슨에 따르면 지난 3월말 기준 한국의 수주잔량은 2천759만CGT로 2004년 3월말의 2천752만CGT 이후 최저치다.
3월말 전 세계 수주잔량은 1억261만CGT로 지난달(1억416만CGT)보다 약 155만CGT가 줄었다. 장기불황의 여파로 문을 닫는 조선소도 속출하고 있다. 중국은 한때 260여 개 조선소에서 선박을 건조했는데 절반 이상이 사라졌으며, 한국과 일본도 각각 10개 이상의 조선소가 건조를 중단했다. 중국은 조선소가 2010년 265개에서 작년 126개로 급감했고, 한국은 같은 기간 30개에서 18개로, 일본은 71개에서 61개로 줄었다. 중국의 한 조선소는 장기불황에 시달리다 못해 주차장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장기불황과 과잉공급의 늪에 빠진 글로벌 해운업계는 동맹체 결성과 인수합병으로 살길을 찾고 있다. 비용 절감을 위한 얼라이언스는 20년 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합종연횡이 더욱 활발해졌다. 세계 시장 점유율 1·2위인 덴마크의 머스크와 스위스의 MSC가 지난해 초 '2M'을 출범시킨 것이 동맹체 재편의 신호탄이었다. 이들은 애초 3위 업체인 프랑스의 CMA CGM과 함께 'P3'를 만들려고 했지만, 중국 정부의 불허로 계획을 포기했다. 2M을 비롯해 현대상선과 독일의 하팍로이드 등 6개 해운사가 모인 'G6', CMA CGM과 차이나쉬핑(중국해운) 등 3개 선사의 '오션 3', 한진해운과 중국 코스코(COSCO·중국원양해운), 대만 에버그린 등의 'CKYHE'까지 4개 얼라이언스가 있지만 이달 들어 균열이 생겼다.
세계 3위 CMA CGM과 4위 코스코가 에버그린, 홍콩의 OOCL(오리엔트 오버시즈 컨테이너 라인) 등과 함께 '오션 얼라이언스'를 결성한다고 지난주 발표한 것이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이 각각 속한 G6와 CKYHE는 선사들의 대거 이탈로 와해 위기를 맞았다. 이들 얼라이언스에 속한 8개 선사는 생존을 위해 이합집산에 나서야 할 전망이다. 해운업계에서는 합병 바람도 거세다. CMA CMG은 지난해 말 싱가포르 선사인 넵튠오리엔트라인(NOL)을 인수하기로 했다. 중국 선사인 코스코와 차이나쉬핑도 통합하기로 하고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세계 철강업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고성장 엔진이 멈추면서부터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 온 중국의 성장세가 최근 주춤하면서 중국 내 철강 소비량이 급감했다. 하지만 중국 업체들이 생산량을 줄이는 대신 수출을 늘리자 철강 가격은 폭락했다. 이 영향으로 인도, 호주 등 전 세계 철강 산업이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인도의 철강업체 '타타 스틸'은 올 3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영국 내 공장을 전부 또는 일부 매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영국 철강업계의 80%를 차지하는 타타 스틸이 사업 철수를 이야기하면서 영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타타 스틸이 영국에서 철수하면 총 1만5천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매각 대상에는 영국 최대 제철소이자 직원 7천명이 근무하는 포트 탈봇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원 강국인 호주의 철강업도 벼랑 끝에 내몰렸다. 철강업체 아리움은 이달 초 사실상 파산과 다름없는 자발적 법정관리를 선언했다. 중국과 경쟁할 수 없는 생산비 격차에다가 날로 떨어지는 철강 가격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중국이라고 버티기 쉬운 상황은 아니다.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철강 산업 구조조정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중국 정부는 2월 철강 업종에서 50만명을 감원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감산을 통해 연간 철강 생산량을 2020년까지 11억t으로 맞출 계획이다. 최근에는 아예 한 번 문을 닫은 철강 공장의 가동 재개를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철강 가격이 오르면서 생산업자들이 시장에 돌아올 조짐을 보이자 중국 내 최대 철강 산지인 허베이(河北)성 지방정부가 이같이 밝히며 제동에 나선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지난 2년간 국제유가의 폭락은 북미 지역의 에너지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촉발했다. 셰일 혁명에 기댄 북미 지역의 원유 공급 증가는 경기침체에 따른 수요 부진과 맞물려 유가에 직격탄이 됐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들의 대규모 부양책은 석유업체들의 빚을 늘리는 데 일조했고, 이는 결국 유가가 하락하면서 기업들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지난 15일 발표된 로펌 헤인즈앤분의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1월 이후 현재까지 북미(미국, 캐나다) 지역에서 63개의 에너지 업체들이 파산했다.
이들의 부채는 총 225억달러(약 26조원)에 달했다. 파산한 업체 대부분은 셰일오일을 시추하는 업체들이다. 올해 들어서만도 이 중 21개 업체가 파산해 기업들의 파산 속도는 가속화되는 모습이다. 미국의 하루 석유생산량은 작년 6월 역대 최고치인 961만배럴까지 늘어났다가 현재 7%가량 줄어든 상태다. 미국의 석유생산량은 관련 기업들의 생산 축소로 계속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은 올해 4∼6월 미국의 하루 원유생산량이 879만배럴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유업체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 민간 석탄업체인 피바디 에너지와 세계 최대 재생에너지업체인 선에디슨도 파산보호를 신청해 에너지 업체들이 다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의 경영난이 커지면서 인력 구조조정도 에너지 부문에서 두드러진다.
매달 미국 기업들의 감원규모를 발표하는 챌린저, 그레이 앤 크리스마스(CG&C)에 따르면 에너지 업종에서 올해 1분기 총 5만2천900명이 감원돼 가장 많은 인력이 줄어든 업종에 포함됐다. 세계 최대의 원유 서비스업체인 슐럼버거는 2014년 11월 이후 전체의 약 4분의 1인 3만4천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에너지 업체들의 고충도 커지고 있다. 영국의 대형 에너지업체 BP는 지난해 손실액이 65억달러(약 7조8천500억원)에 달했다. BP는 작년 4천명을 감원한 데 이어 내년까지 7천명을 추가로 감원한다는 계획이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