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경제, 산업구조개편 부진, 선진국에 기술도 빼앗겨--산업구조개편 부진-30대그룹 계열 1100개사 중 400여곳 적자
우리경제의 산업구조 개편이 지지부진해지는 동안 국내 경제성장률은 2%대에 주저앉으며 경제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현재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솔직히 정부가 구조개혁 의지를 갖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구조조정을 직접 챙기겠다”고 나서고 부처 간 구조조정 협의체가 재가동될 태세지만 금융권의 반응은 매우 냉소적이다. 그동안 말만 요란했지 부실기업 ‘정리’보다는 ‘지원’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조선업종도 STX조선에만 2013년 이후 당초 계획의 2배가량인 4조5000억 원의 자금이 투입됐다. 성동조선해양은 4200억 원이 긴급 수혈된 뒤 삼성중공업의 위탁경영을 받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에는 혈세 4조2000억 원의 지원이 결정됐다. ‘대마불사(大馬不死)’처럼 상태가 심각한 기업들이 정부 주도하에 채권단의 지원을 얻어낸 뒤 수명 연장에 성공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소심한 정부-구조개혁을 외면하는 국회-안이한 기업’이라는 ‘트라이앵글’에 갇혀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19대 국회는 정쟁에 몰두하며 산업 개편을 돕기는커녕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기업활력 제고를위한특별법’(일명 원샷법)은 발의된 지 210일 만에 올 2월 겨우 통과됐다. 기업의 워크아웃 작업을 돕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 개정안 역시 지난해 말 일몰되면서 공백 상태를 빚다가 올해 2월 임시국회에서 가까스로 처리됐다. 부산과 경남권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들은 수시로 은행장들을 호출하며 자신의 지역구에 거점을 둔 기업을 살려달라고 압박해 일을 꼬이게 만들었다. 금융권 관계자는 “성동조선해양에서 우리은행이 돈을 빼겠다고 하자 정치권이 이광구 우리은행장에게 수차례 지원 요청을 전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4·13총선을 앞두고는 너나없이 기업을 감싸 안았다. 총선 이틀 전인 11일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울산 현대중공업 근로자들의 표를 겨냥해 “쉬운 해고가 절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게 대표적이다.
기업도 구조개혁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진그룹, 현대그룹 등 오너 기업들은 상황 분석을 안이하게 하다가 구조조정의 적기를 놓쳤다. 반면 독일 지멘스가 다각화했던 사업을 산업솔루션, 에너지, 헬스케어, 도시인프라 등으로 집중시키고 제너럴일렉트릭(GE)이 가전사업부문을 정리한 뒤 소프트웨어 산업에 나서는 등 글로벌 기업들은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구조개혁이 늦어지면 단순히 먹거리가 줄어드는 것을 넘어 위기가 가중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우리나라 30대 그룹 계열사 1100곳 중 400여 곳이 적자”라며 “이것을 그대로 두면 은행으로 부실이 전이돼 금융위기가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한계기업이 급증하며 구조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정부는 지난해 10월부터 부처 간 구조조정협의체를 통해 산업 개편에 대대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두 차례의 ‘산업별 구조조정협의체’ 회의 결과는 기대를 크게 밑돌았다. 조선, 해운, 석유화학, 철강, 건설을 5대 취약업종으로 꼽고 합금철과 석유화학의 테레프탈산(TPA) 분야에서의 감산(減産)을 권고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당초 업황을 분석해 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겠다던 업종별 리포트는 “현장에 오해를 부를 수 있다”며 발표하지 않았다. 최근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역시 구조조정 첫 타깃으로 철강업을 지목하면서도 “정부가 아닌 민간 주도로 할 것”이라며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부처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일에도 취약했다. 실제로 지난해 현대상선을 두고 ‘살려야 한다’는 해양수산부와 ‘더이상은 방법이 없다’는 다른 부처들의 의견이 대립하면서 구조조정 시기만 늦추는 결과를 낳았다. 한 전문가는 “정부가 단기적으로 일자리가 줄고, 국내총생산이 줄어드는 등 경제 성적표가 나빠질 것을 우려하는 모습”이라며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기업이 버린 기술 독일이 사 1조대박 횡재
이뿐만 아니다. 기업도 문제다. 지난해 2월 삼성전자는 "'3차원 반도체(FinFET·핀펫)'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바일용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반도체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한 기술적 성취"라는 자평도 했다. 3차원 기술로 만든 반도체는 평면 구조의 기존 제품과 비교해 성능과 에너지 효율이 훨씬 뛰어난 데다 칩의 크기도 극소화할 수 있다. 삼성의 스마트폰을 더 얇게 만들고 배터리 사용 시간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하지만 당시 삼성의 핀펫 반도체 생산은 경쟁사인 인텔보다 4년이 늦은 것이었다.
사실 삼성전자는 오래전에 이 기술을 선점할 기회가 있었다. 15년 전인 2001년 10월 이종호 당시 원광대 교수가 경기도 기흥의 삼성 반도체 사업장을 찾아와 자신이 개발한 '3차원 반도체 양산(量産) 기술'을 공개했었다. 그는 삼성전자 임원들 앞에서 "현재 대세인 2차원 평면 소자로는 고성능 반도체 개발에 한계가 있다"면서 "소자의 구조를 3차원으로 바꾸면 소비 전력과 제품 크기를 줄이면서 성능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이 교수가 "지금 3차원 반도체 기술에 투자하지 않으면 늦는다"고 호소했지만 참석자들은 "너무 앞서가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교수는 결국 1년 4개월 뒤인 2003년 2월 인텔(Intel)에 이 기술을 제안했고, 이후 로열티를 받는 조건으로 이 회사에 기술 이전을 했다. 인텔은 2011년 세계 최초로 핀펫 반도체 양산에 성공,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이라는 위치를 공고히 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당시 우리도 3차원 반도체 기술 개발에 나섰던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게다가 당시 세계 반도체 업계가 공급 과잉으로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수천억원의 개발 비용이 드는 기술을 선뜻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은 과감한 기술 투자를 외면하면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가 될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이종호 서울대 공대 기획부학장은 "당시 한국 대기업의 시스템에선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마찬가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2위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인 독일의 SAP는 2011년부터 모든 소프트웨어를 '하나(HANA)'라는 빅데이터(대규모 데이터) 처리 기술에 기반해 만들고 있다. 이 기술은 기존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보다 읽고 쓰는 속도가 수백배 이상 빠른 메모리 반도체에 대부분의 데이터를 올려놓고 처리한다.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속도로 대용량의 데이터 처리가 가능해졌다. 독일 SAP가 지난해 '하나'를 적용한 빅데이터 처리 소프트웨어로 벌어들이는 돈은 10억유로(약 1조3000억원)가 넘는다. SAP에 이렇게 큰 수익을 안겨준 기술 역시 한국에서 태어났다. 지난 2000년 서울대 차상균 교수가 연구실 대학원생들과 함께 데이터베이스(DB) 처리 기술을 연구하다 개발했다.
'하나' 역시 처음부터 독일 SAP로 넘어가지 않았다. 차 교수는 당시 이 기술을 국내에서 상용화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국내 대기업을 접촉하기도 하고, 직접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을 만들기도 했다. 차 교수는 "당시 한국에는 'IT 붐'이 일고 있었지만, 다들 당장 돈이 되는 기술에만 관심이 있었다"면서 "'하나' 같은 소프트웨어 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투자자나 기업들은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이들은 2002년 미국 실리콘밸리로 떠났다. 여기서 SAP를 만났다. SAP는 한국에서 온 생소한 기술에 기대 이상의 관심을 보였다. 머지않아 빅데이터 시대가 도래하면 기존 기술보다 훨씬 빠른 데이터 처리 기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측했던 것이다. 이 기술은 결국 SAP로 매각됐다.
넝쿨째 굴러 들어온 해외 신기술을 차버린 사례도 있다. 외신에 따르면 스마트폰용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OS)를 개발한 앤디 루빈(Rubin)은 2004년 안드로이드 OS를 팔기 위해 삼성전자와 접촉했다. 루빈은 한국을 찾아와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에 무료로 운영 체제를 제공해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사업 전략을 소개하면서 제휴와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삼성전자 임원들은 그의 제안을 뿌리쳤다. "수천명의 우리 회사 엔지니어가 못하는 일을 직원 6명인 당신 회사가 한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에서 거절당한 안드로이드는 2주 뒤 구글에 5000만달러(약 567억원)에 인수됐다. 안드로이드 역시 삼성전자가 했다면 글로벌화에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소니도 자사 제품을 글로벌화하려 했다가 수없이 실패했었다. 국내 스마트폰 업체 고위 관계자는 "작은 '나사' 하나 필요 없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사업은 현재 이익률이 70%가 넘는다"면서 "당시 한국이 안드로이드를 인수했더라도 반드시 성공했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구글에 완전 종속되는 상황은 피했을 것"이라고 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