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돌지 않는다. “단기부동자금 930조원 초과”
우리 실물경제의 단기 부동자금이 작년 말 사상 처음으로 930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단기 부동자금의 연간 증가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다. 낮은 금리로 시중에 돈은 많이 풀렸지만, 실물경제에 대한 투자 등을 통한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고 현금성 자산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17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단기 부동자금은 약 931조3천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1년 전보다 무려 17.2%나 증가한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현금 76조3천억원, 요구불 예금 181조9천억원,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450조2천억원, 머니마켓펀드(MMF) 58조2천억원, 종합자산관리계좌(CMA) 43조8천억원, 양도성예금증서(CD) 21조1천억원, 환매조건부채권(RP) 8조4천억원 등이다.
MMF 등의 잔액은 금융사간의 거래인 예금취급기관 보유분과 중앙정부, 비거주자의 보유분을 빼고 집계한 것이다. 여기에 6개월 미만 정기예금 70조5천억원과 증권사의 투자자예탁금 20조9천억원을 합쳐 시중에 대기 중인 단기 부동자금을 구했다. 2008년 말 539조6천억원이던 단기 부동자금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2009년 646조7천억원으로 19.8% 급증했었다. 이는 경제의 덩치를 보여주는 당시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전년 대비 증가율(4.3%)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어 단기 부동자금은 2010년 653조5천억원(1.0%), 2011년 649조9천억원(-0.5%), 2012년 666조4천억원(2.5%)의 추이를 보이며 명목 GDP보다 낮은 증가율을 보여왔다.
그러나 2013년 712조9천억원으로 7.0%, 2014년 794조8천억원으로 11.5% 급증한 데 이어 작년에는 더욱 큰 폭으로 늘어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다시 단기 부동자금이 경제 규모의 증가 속도를 추월했다. 무엇보다 연 1%대의 저금리가 장기화하면서 시중에 돈은 많이 풀렸지만, 실물경제에서는 마땅한 장기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현금화하기 쉬운 대기성 자금 형태로 금융시장 주변을 떠도는 데 따른 현상이다. 반면, 실제 중앙은행에 의해 시중에 풀린 자금이 경제 전반에 얼마나 잘 도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통화승수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통화승수는 높을수록 금융회사들이 고객을 상대로 신용 창출을 활발히 했다는 의미가 있는 지표로 일반적으로 본원통화에 대한 광의통화(M2)의 배율로 산출된다.
작년 12월 통화승수(평잔 기준 본원통화 대비 M2 기준)는 17.5배에 그쳤다. 1996년 10월 이후 19년여 만에 최저다. 통화승수는 1999년 한때는 32.7배에 달했으나 갈수록 낮아져 2014년 12월에는 19.0배였다. 통화당국은 통화승수 하락세의 이유로 고액권인 5만원권 현금의 보급 확산, 달라진 금융상품의 구조 등을 원인으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통화정책 효과가 전혀 작동하지 못하고 무력화되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전 세계 금융시장의 변동성 확대는 일본, 유로존 등 주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통한 경기 부양에 대해 회의론이 확산됐기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은행(BOJ)의 첫 마이너스 금리도입 이후 엔화가 강세를 보인 것도 통화정책 효과에 대한 시장의 회의론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 증시의 심리적 마지노선인 코스피 1,800선의 지지 여부도 장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한국은행은 2012년 7월 연 3.25%이던 기준금리를 3.00%로 내린 것을 시작으로 7차례에 걸쳐 현재의 1.50%까지 인하했다. 시장에서는 연내 추가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하고 있다.
경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