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이상가뭄 심각
7일 오후 보령호 상류인 충남 보령시 미산면 풍계리. 주민들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극심한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밭작물을 바라보며 "작물이 죽어버려 수확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풍계리 이고우(63) 이장은 "우리 마을은 (지하수를 이용하는) 간이상수도를 주로 쓰는데 지하수가 이미 다섯 달 전쯤부터 말라가고 있다"면서 "요즘은 하루 3~4시간만 물을 쓸 수 있어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다"고 하소연했다.
보령댐은 충남 서북부 지역 유일한 광역상수원으로 서산·당진·홍성 등 8개 시·군에 사는 48만 명에게 하루 20만t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현재 저수율은 22.4%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8일부터 서산·당진·보령·서천·청양·홍성·예산·태안 등 8개 시·군에는 평소보다 20% 감소한 16만t만 공급된다. 이에 따라 농업용수뿐만 아니라 생활용수까지 제한 급수가 이뤄져 큰 불편이 이어질 전망이다.
수자원공사는 "당진·태안 등 이 지역 5개 화력발전소도 8일부터 물 공급이 줄어들지만 전력 생산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충남 서산시 서산종합운동장 내 수영장은 운영이 이미 중단됐다. 그나마 운영되는 헬스·요가 수업을 받는 시민들은 가뭄으로 샤워장 운영이 중단되면서 씻지도 못하고 돌아간다. 이병섭 서산시체육시설관리사업소 운영팀장은 "가뭄이 심한데 어떻게 샤워장을 운영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목욕탕과 식당 등 평소 물을 많이 쓰는 업소들은 초비상 상태다. 홍성읍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45)씨는 "제한 급수로 설거지를 하지 못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했다.
수자원공사 관계자는 "충남 지역의 극심한 가뭄은 올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비가 더 적게 온 데다, 보령댐 규모가 작아 저수량도 그만큼 적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령댐 저수량(1억1700만t)은 소양강댐(29억t)의 4% 수준이다. 정부는 4대강 공사로 물을 확보한 금강 백제보에서 임시 관로를 통해 물을 끌어와 20km 떨어진 보령댐에 공급할 계획이지만, 공사가 끝나는 내년 2월까지는 꼼짝없이 가뭄 피해가 예상된다. 이상열 충남도 물관리정책과 주무관은 "현재로선 물 절약이 최우선"이라고 했다.
다른 지역도 가뭄 피해가 시작됐거나 곧 가시화할 전망이다. 전국 17개 다목적댐은 용수 상황에 따라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등 4단계로 관리되고 있다. 보령댐은 '심각' 단계, 대청댐은 '경계' 단계에 진입했다. 횡성·주암·용담댐은 저수율이 역대 최저로 떨어진 상태다. 안동댐과 소양강댐, 충주댐, 임하댐 등도 역대 최저 수준에 근접해 있다. 댐이 없는 인천 강화도의 경우 2년 연속 비가 적게 내려 물 부족이 특히 심각하다. 지난 9월까지 인천 강수량은 47㎜로 평년(123㎜)의 38% 수준이다.
가뭄 전문가인 변희룡 부경대 교수는 "가뭄은 경기 북부와 충북, 경북 내륙 등지로 확대될 전망"이라며 "특별한 상황 변동이 없는 한 내년 봄까지 가뭄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통 장마철이 끝나 1년 중 댐의 물이 가장 풍부한 이맘때 벌써 가뭄 피해를 겪고 있는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자원 공사 관계자는 "내년 봄에도 비가 충분히 오지 않으면 전국적으로 용수공급 중단 같은 최악의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 고충 심각
충남 일부지역 제한급수를 하루 앞둔 7일 홍성군 홍성읍 월산리에 사는 김병팔 씨(79)는 집 마당에 있는 큰 고무통에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 그는 이달 초 모의훈련 차원에서 격일제 단수가 시행된 이틀 동안 큰 불편을 겪었다. 화장실 사용은 물론 세탁기조차 돌리지 못했다. 김 씨는 “세탁물이 쌓여 미리 받아둔 물로 손빨래를 해야 했다. 70년 넘게 홍성에 살면서 물이 끊긴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내년 봄까지 물 공급이 제한된다고 하는데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홍성군을 포함해 서산 당진 예산 등 충남 서북부 지역 8개 시군이 8일부터 공식 제한급수에 들어간다. 사상 초유의 제한급수를 앞두고 8개 시군은 이달 1일부터 4일까지 모의훈련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다른 시군들은 수압을 낮추는 방식으로 물 공급을 제한한 데 반해 유일하게 홍성군은 오후 10시부터 다음 달 오전 10시까지 격일제 단수를 실시해 주민들의 불편이 컸다. 단수 조치를 앞둔 지난달 말에는 대형 플라스틱 용기 품귀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리 물을 받아두기 위해 대형 플라스틱 용기를 찾는 주민이 늘어난 탓이다. 건축자재상 직원 현천 씨(36)는 “김장철에만 팔리는 제품인데 지난달 말에는 하루에 수십 개가 팔려 물건이 달렸다”고 말했다.
홍성군은 단수 조치에 주민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당초 계획을 바꿔 공식 제한급수 기간에는 수압을 낮추는 감압 방식으로 물 공급을 제한하기로 했다. 하지만 수압을 낮추면 고지대에 물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홍성군 관계자는 “홍성군은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비해 고지대가 많다”며 “감압 방식으로 하루 물 사용량 20%를 줄이지 못하면 불가피하게 강제 단수를 시행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도 “앞으로가 더 걱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최연옥 씨(49)는 “업소용 세탁기를 돌리려면 가정용 세탁기보다 높은 수압이 필요한데 수압이 떨어지면 영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편 최악의 가뭄에 대비해 8개 시군의 식수원인 보령댐으로 물을 공급할 부여군 규암면 백제대교 인근 금강 백제보 하류는 가뭄이라지만 푸른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오후 3시 백제보의 초당 방류량은 40t. 예년 이맘때의 초당 56∼103t보다 적긴 하지만 물거품을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물이 흘러나갔다. 정부는 이곳에서 내년 3월이면 말라붙을 보령댐 상류까지 21km 구간에 도수로를 만들어 하루 11만5000t의 물을 공급할 계획이다. 이 정도의 물을 끌어대기 위해 도수로 관로(지름 1.1m)로 취수돼야 할 물의 양은 초당 1.3t이어서 백제보의 공급능력은 충분하다.
4대강 사업 이전에는 이런 긴급대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부여가 고향인 정태수 충남도 언론홍보팀장은 “1970년대 말 가뭄이 극심하면 백마강은 백사장처럼 말라버렸다. 굴착기로 강의 모래바닥에 물길을 내서 지하에 스며든 물을 짜낸 뒤 3, 4단 양수를 통해 농경지에 물을 대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충남도 물관리 부서 관계자는 “4대강 사업으로 물의 그릇이 커져 가뭄 대비가 가능한 것은 분명하다. 4대강이 정치 이슈가 되다 보니 효과를 언급하거나 활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도수로 공사는 4대강 사업 문제에 유보적 입장이었던 안희정 충남지사가 제안해 이뤄졌다.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시도지사 간 영상회의 때 금강물을 보령댐으로 끌어대는 것을 가뭄대비책으로 제안하자 이 전 대통령이 즉석에서 “좋은 아이디어”라며 내각에 실행을 지시했다. 재난대책으로 이뤄지는 도수로 공사는 ‘속도전’을 방불케 할 것으로 예상된다. 건설공기도 짧고 겨울공사이지만 내달 착공해 내년 2월까진 반드시 완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수자원공사 관계자는 “전체를 설계한 뒤 공사를 하는 한가한 방식으론 어렵다. 일부 구간 설계 후 공사를 하면서 다른 구간 설계에 돌입해야 한다. 재난상황이어서 사전재해영향성검토와 소규모환경영향성평가도 면제받았다”고 밝혔다.
엄원지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