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PP 7년만에 타결, “우리경제 일본에 당했다”
세계 최대 단일 자유무역지대를 표방하는 ‘환(環)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이 타결됐다. 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TPP 12개국 각료회의는 6일간 협상을 마무리하고 협상 타결을 공식 선언했다. 2008년 미국의 참여로 본격화된 TPP 협상이 7년여 진통 끝에 일단락된 것이다. TPP는 세계 1위와 3위 경제대국인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며 총 12개국이 참여하는 사상 최대규모의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또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 증가에 맞불을 놓는 미국·일본의 경제블록 합작품이라는 측면도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TPP에 반대하는 미국 연방의회를 설득하면서 “우리가 세계경제 질서를 만들지 않는다면 중국이 우리를 대신해서 세계경제 질서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TPP가 단순 자유무역협정이 아니라 미국·일본 등 서방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경제·안보 동맹’이란 의미다.
한국 정부는 TPP 협상에 지금까지 불참해왔다. 이 때문에 한국이 자칫 ‘환태평양 경제동맹의 낙오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5일 “한국이 TPP에 가입하면 발효 후 10년간 총 1.8% GDP 증대 효과가 있지만 계속 가입하지 않으면 0.12% 감소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총괄본부장은 “경제적 측면 외에도 세계 최강국이자 한국의 동맹국인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동맹이란 점에서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TPP에 가입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TPP 가입이 독(毒)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천일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TPP에 가입하면 사실상 일본과 FTA를 맺는 효과가 발생한다”며 “이는 정밀기계·자동차 등 일본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 한국 제조업 분야에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TPP 체결 전까지 우리나라는 FTA 경쟁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우리나라는 미국·EU·아세안과의 FTA를 발효했고 중국과는 FTA 발효를 앞두고 있다. 체결됐거나 협상중인 FTA 대상 국가만 60나라에 육박하며 전 세계 GDP의 75%를 차지하는 국가들과 FTA를 맺었다. 반면 일본은 미국·EU·중국 등과 FTA를 체결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일본은 이번 TPP 타결로 단숨에 전 세계 GDP의 40%를 차지하는 국가들과 FTA를 맺게 됐다. 현재 진행 중인 EU와의 FTA 협상도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FTA로 경제 영토를 넓혀가는 한국을 부러운 눈으로 보던 일본 입장에선 TPP가 한국을 일거에 추월하는 전략을 택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이번 타결로 완성차와 자동차 부품, 소재 부품, 섬유산업 같은 주력 업종에서 한국 제품의 타격이 예상된다. TPP 참여국인 말레이시아와 멕시코 등은 완성차에 대해 15~30%의 고율(高率) 수입 관세를 유지하고 있다. TPP가 타결되면서 두 나라에서 일본 자동차 업체와 경합하는 한국 자동차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 면에서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현대기아차가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기대했던 한·미FTA 효과가 소멸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일본산 완성차에 대한 수입 관세율을 단계적으로 철폐하고, 자동차 부품 80%에 대한 관세는 즉각 없애기로 일본과 합의했다. 김태년 한국자동차산업협회 이사는 “주요 경쟁 시장에서 일본 경쟁사에 밀리지 않으려면 우리도 하루빨리 TPP에 가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TPP타결에 의해 경쟁력이 약화되는 우리 품목은 섬유·차·디스플레이 등
우리 섬유·의류산업은 국내 제조업 ‘공동화(空洞化)’ 우려가 나오고 있다. 베트남 등 TPP 가입국으로 공장을 옮겨야 미국·일본 등 TPP 역내(域內) 지역으로 수출할 때 관세 인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원단이나 부품을 베트남 현지 공장으로 수출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제품의 일정 비율 이상을 TPP 역내에서 조달해야 하는 ‘원산지 규정’ 때문이다. 코트라(KOTRA) 관계자는 “TPP 체결로 섬유·의류 분야 기업들은 베트남 이전 등 해외 탈출이 더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디스플레이·기계부품 등 중간재 수출에서도 일본에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 TPP 가입 12개 회원국에 대한 중간재 수출에서 한국은 1180억달러, 일본은 1260억달러(2012년 기준)로 시장을 사실상 양분(兩分)해 왔다. 하지만 관세 인하 효과에 힘입어 일본이 가격 경쟁력에서 한국을 한발 앞설 공산이 높아졌다.
TPP 참가비 너무 비싸면 포기할 수도
우리 정부는 그동안 한·중 FTA 등에 몰두하느라 TPP 참여에 다소 소극적으로 임해왔다. “TPP는 국익(國益) 극대화의 방향으로 가입을 적극 검토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수차례 밝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향후 TPP 최종 협정문이 공개되면 우리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공청회, 국회 보고 등의 절차를 거쳐 정부 입장을 최종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최종 협정문은 협상 타결 2~3개월 뒤에 나오고, 이를 검토하는 데 1개월 이상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 연말이나 내년 초쯤 정부 공식 입장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TPP 참여로 정부가 입장을 정할 경우 한국은 TPP 12개국과 본격 협상에 착수해야 한다. 한국은 TPP 12개 1차 회원국 가운데 일본과 멕시코를 제외한 10개국과는 개별 FTA를 이미 맺고 있다. 따라서 잘만 하면 협상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
하지만 1차 회원국이 되지 못한 데 따른 ‘참가 비용’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난관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자동차·기계산업 등의 분야에서 우리나라에 강도 높은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은 일본이 큰 변수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한국이 신규 참가국으로 TPP에 가입을 시도할 경우 12개 회원국 모두로부터 참가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회원국이 '동의'의 대가로 자국에 유리한 추가 혜택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며 “여기서 발생하는 ‘참가 비용’이 과도할 경우, TPP를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TPP참여, 큰 논란거리로 부상할 전망이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