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악화, 김정은 결단에 달려있다.
북한이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을 계기로 4차 핵 실험까지 운운하며 군사적 긴장 수위를 높이면서 8ㆍ25 합의 이후 모처럼 조성됐던 남북관계 유화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될 조짐이다. 당장 다음달 20일로 예정됐던 이산가족 상봉 성사 여부도 위태로워졌다. 정부는 “예단은 금물”이라며 신중한 입장이지만, 북한이 실제 도발을 감행한다면 당국간 회담 등 8ㆍ25 합의를 이끌어갈 동력 마련이 쉽지 않아 보인다.
불투명해진 이산가족 상봉
정부 당국과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에 맞춰 장거리 로켓 발사 등 무력 시위에 나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다. 일종의 내부 축포 개념인 점을 감안하면 시기는 10월 10일 이전이 될 공산이 크다. 이후 북한의 도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제재 조치와 북한의 추가 도발이 이어진다면 이산가족 상봉이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상봉 날짜 합의 이후 제기됐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북한의 도발 변수에도 이산가족 상봉은 성사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다. 정치적 문제와 인도적 사안은 별개로 분리시켜 진행한다는 점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북한이 도발을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제재 움직임에 동참하며 강력한 항의 표시를 하면서도 상봉은 진행하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정부 소식통은 “도발 형태와 수위가 관건이지만, 일단 이산가족 상봉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기류가 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북한 역시 도발을 감행하더라도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대북 강경책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지렛대 내지는 협박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미사일이든 핵실험이든 자신들의 주권사항이라고 주장하며 인도적 사안을 외면하는 것 또한 앞뒤가 맞지 않다. 실제 북한은 15일 판문점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 생사확인 의뢰서를 맞교환 하는 등 이산가족 상봉 준비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북한이 먼저 판을 깰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도발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 수위 및 우리 정부가 얼마나 보조를 맞추는지 여부를 보고 막판까지 저울질 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2013년 9월에도 상봉 행사를 불과 나흘 앞두고 우리 당국의 강경 발언 등을 문제 삼아 행사를 전격 취소한 바 있다.
동력 상실해가는 8ㆍ25 합의, 남북관계 악화 우려
정부는 북한이 미사일과 핵실험까지 운운한 데 대해 “아직 예단할 수 없다”며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8ㆍ25 합의 후속조치인 당국간 회담 제의 여부에 대해서도 “(시기와 의제 등) 종합적으로 판단해 여전히 물건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며 신중한 입장이다. 일각에서 북한의 도발 변수를 제어하기 위해 이산가족 상봉 이전 우리가 선제적으로 대화를 제의하며 상황 관리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정부는 역시 부정적이다.
가시화되지도 않은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는 꼴이 되고 협상 테이블에 앉아도 북한을 제어할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북한은 우리가 아닌 미국과 풀 문제라고 나올 게 뻔한 상황에서 설전을 벌이는 것 이외에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며 “북한이 미사일에 이어 4차 핵실험까지 감행한다면 긴장 국면이 내년 상반기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고, 우리 정부의 결단과 의지만으로 8ㆍ25 합의 동력을 이끌어갈 국면 전환을 이끌어내기 쉽지 않아 보인다”고 내다봤다.
북한 왜이러나? 속내는?
북한이 15일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어 핵무기 능력 고도화를 위한 제4차 핵실험을 시사함에 따라 한반도의 긴장감이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의 이런 행보는 한·중 정상회담에 이은 미·중, 한·미 연쇄 정상회담을 앞두고 존재감을 부각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 정책이 효과가 없음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북 압박정책 전환 의도
최근 북한은 고립감이 심화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8·25 합의로 남북 관계에 약간 숨통이 트이는 분위기이나 살얼음판을 걷고 있고, 미·일과도 핵과 일본인 납치 문제 등으로 꽉 막힌 상황이다. 2013년 2월 중국과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체제 출범에 즈음해 실시된 제3차 핵실험 이후 냉랭하고, 러시아와도 급격한 관계 개선은 없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 주석의 9·2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의한 것은 북한의 위기감을 증폭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달 하순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가 비중 있게 논의될 가능성이 있고, 10월1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북한 및 북핵 관련 중대 합의 발표가 예고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관련 발언은 북한 변수를 재인식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북한이 ‘나도 여기에 있다’는 존재감을 알리는 것”이며 “연쇄 정상회담과 관련해 ‘우리를 감안하고 판을 짜라. 우리를 감안하지 않으면 너희끼리 짠 틀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시사한 조선중앙통신 보도 시점을 미국 현지 시간으로 14일 오전을 택한 것도 다분히 미국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한 전문가는 “미국의 여론을 탐색하는 의도가 있다”며 “보도 시점상 미국 시간 아침이고 미·중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 등을 감안해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대북 압박이 실효가 없음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의 대북 정책 전환을 유도하려는 목적도 깔려있다. 다른 전문가는 “미·중 정상이 만나든 한·미 정상이 만나든 대북 압박과 제재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제재와 압박을 뚫고 진행된 성과를 과시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감행 여부는 김정은 결단에 달려”
북한의 실제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 가능성에 대해 정부 당국자들은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정치적 결단만 내리면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김 제1위원장이 아니고서는 감행 여부를 예단하기 어렵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최근 영변 핵시설 주변의 움직임은 활발한 반면에 과거 장거리 미사일이 발사됐던 함북 화대군 무수단리 동해위성발사장이나 평북 철산군 동창리 서해발사장에서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군 당국은 “아직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보근 국방정보본부장은 지난 12일 국감에서 핵실험은 최소 1개월 전, 장거리 미사일은 일주일 전 징후 포착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기술적 차원에서 장거리 미사일 발사시험을 한번 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은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시험을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정치적 요인보다는 단계별로 기술 발전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 실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 “상황악화시 북 단호대응 직면” 경고
한편, 정부는 15일 북한이 '핵뢰성' 등의 표현으로 핵위협을 가한 것과 관련, 상황을 악화하는 조치는 국제사회의 단호한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북한이 핵위협을 계속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를 취할 경우, 이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으로 국제사회의 단호한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핵 위협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9·19 공동성명과 관련 안보리 결의를 준수함으로써 완전한 비핵화의 길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북한은 전날에는 국가우주개발국 국장과 조선중앙통신의 문답을 통해 장거리 로켓 발사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에 대해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15일 "북측이 국제사회의 엄중한 경고에도 전략적 도발을 했을 경우 유엔 안보리 차원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이 가능하도록 안보리 이사국을 포함한 관련국들과 긴밀히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한미 양국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과 관련, 모든 상황에 대비해 긴밀히 공조하고 있고, 현재까지 (북측의) 특이 동향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노 대변인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중대한 도발행위이자 군사적 위협이며,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모든 행위를 금지한 유엔 안보리 결의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북한이) 발사하기 전에 도발을 차단하는, 막는 외교적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북한의 전략적 도발 가능성에 대응해 안보리 이사국들과의 협의에 들어간 상태다.우리 정부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황준국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취임 후 처음으로 뉴욕 유엔본부를 방문, 15일(현지시간)까지 안보리 15개 이사국 대사들을 면담하고 협조를 요청할 예정이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