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론을 다시 생각한다. "기생(妓生)이라 욕하지 말라!" <기자수첩>
요즈음 따라, 여의도를 늘 보며 기사를 쓰다보면 항상 생각나는 것이 돌아가신 故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이다. 기자는 등단한 시인, 작가이기도 해서 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러 문학의 글쓰는 기법과 기예를 익히려 노력도 했지만 갈수록 문인으로써 늘 뚜렷이 다가오는 생각은 역시 지조다. 지조란 무엇일까? 다른 것없이 그 사람의 정신이요 가치관, 행동양식이 되는 생각의 일부인데 가끔 우리는 '영혼(靈魂)'이라고도 부른다.
중년이 지나가면서인지, 필자도 그 사람의 껍데기에 나타나는 사회적 지휘고하보다 그 사람을 늘 지켜보면서 그 사람이 가진 내면세계를 늘 보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8,15 연휴가 지나가면서 그동안 잘알려지지 않았던 일제침략기의 독립운동가들 중 조선시대 천민계급에 속했던 ‘기생(妓生)’들의 독립운동, 3,1운동 참여가 밝혀져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어 화제다.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이 지닌 문장의 표피보다 글의 본질을 생각하면 요즈음 우리 사회 지도층, 고위층들의 일부가 갑자기 기생으로 보이고 일제치하의 기생들이 고귀하게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전개되고 전국 각지로 파급되자, 진주·수원·해주·통영 등지의 기생들이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통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진주에서 기생독립단 일대가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해 시위 행진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기생 6인을 붙잡아 구금하였는데 한금화(韓錦花)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 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
3월 29일에는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이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慈惠病院)으로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때 김향화(金香花)가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뒤따르던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경찰서 앞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다. 이 사건으로 주모자 김향화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향화
4월 1일에는 황해도 해주에서 읍내 기생 일동이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에 용기를 얻은 남녀노소들이 참여함으로써 만세 시위 군중은 3천명이나 되었다. 당시 해주기생 중에는 서화에 능숙한 기생 조합장 문월선(文月仙)을 비롯해 학식 있는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날 문월선·김해중월(金海中月)·이벽도(李碧桃)·김월희(金月姬)·문향희(文香姬)·화용(花容)·금희(錦姬)·채주(彩珠) 등 8인이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4월 2일에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정홍도(丁紅桃)·이국희(李菊姬)를 비롯한 예기조합(藝妓組合) 기생들이 금비녀·금반지 등을 팔아 광목 4필 반을 구입해 만든 소복 차림을 하고,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 맨 33인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3인이 붙잡혀 6개월 내지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기생 조합소에서 다른 기생 5명을 불러 모아 피고들과 행동을 같이할 것을 권유하여, 그 동의를 얻어 '기생단(妓生團)'을 조직하고, 피고 막래(莫來)는 가지고 있던 금반지를 맡겨 그 돈으로 상장용(喪章用) 핀과 초혜(草鞋)를 사서 이를 다른 기생에게 나누어 주며 같은 복장을 하게 한 후 기생 조합소에서 동일 오후 3시 반경, 통영면 부도정의시장으로 행렬을 지어 걷기 시작하고 피고 2명은 경찰관의 제지에 응하지 않고 선두에 서서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과 함께 시위운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1919년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의 판결문)
1919년 일제하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재판을 받은 기생 정막래(丁莫來·21)와 이소선(李小先·20)의 판결문은 3·1운동 당시 국권을 되찾으려는 민족적 열망에는 직업의 귀천이 없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정막래와 이소선은 금반지와 금비녀를 팔아 같은 옷차림을 하고 수천명에 앞장서 독립을 외쳤다. 당시 일제법원은 정막래에게 징역 6월형을 선고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0대 소년들도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1919년 4월 1일 아침에 함께 경상남도 밀양면 내일동의 영남루 뒷산으로 놀러 갔을 때 윤수선(尹秀善)이 '부산에서는 학생이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다'고 이야기하자 김성선(金性善)과 강덕수(姜德壽)는 윤수선과 함께 밀양에서도 조선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발의하고 윤차암(尹且岩)과 박소수(朴小守)도 이에 동의하였다. (중략)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朴且用)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의 도로를 열을 지어 걸었다."(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
판결문의 주인공인 윤수선, 윤차암, 강덕수, 박소수 등은 당시 밀양공립보통학교, 즉 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4∼15세 소년이었다. 3·1절을 앞두고 '독립운동 판결문 자료집 3·1운동 Ⅱ'를 발간한 국가기록원은 "판결문에 나타난 독립만세시위는 거족적인 운동이었다"며 "판결문의 주인공들은 연령, 종교, 신분, 남녀를 불문하고 연대해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천명까지 만세운동의 행렬을 이뤘다"고 26일 설명했다.
일제침략기의 독립운동가들 중 조선시대 천민계급에 속했던 ‘기생(妓生)’들의 독립운동, 3,1운동 참여는 그동안 잘 밝혀지지 않았다가 근래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3,1운동은 당시의 남녀노소, 신분의 귀천도 없었다. 당시 기생(妓生)은 신분상 천민계급이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밝혀져 주목을 받는 가운데 그들의 미모뿐만 아니라 재능, 학식도 큰 손색이 없는 예술인(藝術人)이었음이 조명되고 있다.
오늘날 고위 공무원, 교수, 장성, 국회의원, 등 사회 고위지도층이 국가가 글로벌 경제, 안보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성희롱이나 뇌물수수등을 일삼고 오락가락 눈치나 보는 정책에 휘둘리며 대통령 인척은 국가적 망언이나 일삼는 부끄러운 시대에 과연 이들 중 누가 일제침략기의 기생(妓生)을 천했다고 욕할 수 있을까? 조선과 대한민국, 언제나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제 한몸, 가족, 생명 돌보지 않고 피튀기며 나섰던 사람들은 이 땅의 민초(民草)들이었다.
일제침략기의 기생(妓生)들 보다 못나 얼빠진 오늘날 이 땅의 지도층들도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조지훈 선생의 지조론에는 "사람 보기를 초년보다 그 말년을 보라!"고 써 있다. "가난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지만 누구도 사회적, 국가적으로 어찌하지도 못하는 "빈익빈 부익부 시대"에 조지훈의 지조론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일부 일탈하는 사회 지도층, 고위층들이 일제침략기의 기생(妓生)들 보다 훨씬 못하지 않은가?
비록 집안이 몰락하고 먹고살려 기생(妓生)이 되었으며 배운것이라고는 기예(妓藝)밖에 없었지만 어떤 기생(妓生)은 숭고한 독립운동 뿐만 아니라 말년에 대구지방에서 당시, 홍수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상상할 수 없는 거금(巨金)을 내놓아 만인으로부터 칭송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땅에서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여! 뇌물수수에 경제사범에 갑질에 성희롱에 소위 지식인들이여! 과연 그대들이 기생(妓生)보다 낳은 것이 무엇인가?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