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사태, 국제적 망신살로 확산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현실화 되었다. 세계 각국 언론도 한국의 소설가 신경숙씨의 표절의혹 파문을 주목하고 있다. 대표작 <엄마를 부탁해>는 세계 36개국에서 번역되는 등 신경숙씨는 국제 문학계에서도 잘 알려진 한국 작가다. 그는 2011년 ‘맨 아시아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 그가 표절한 대상이 일본의 유명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이어서 해외 언론의 관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한국문학에 대한 국제적 망신살이 뻗쳤다.
<뉴욕타임스>(NYT)는 23일 서울발 기사에서 <엄마를 부탁해>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 중 한명인 신경숙씨가 동료 작가에 의해 표절 의혹이 제기된 지 일주일 만에 자신이 표절했을 수 있다며 사과하고 앞으로 작품집에서 해당 작품을 빼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신씨의 표절 파문과 사과 소식을 보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신경숙이 표절 의혹으로 독자들에게 사과하고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인정했다”며 “처음에 그는 의혹을 부인한 바 있다”고 보도했다. (BBC)도 “한국 작가 신경숙이 일본 단편을 일부 표절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뒤 사과했다”고 소개했다.
BBC News 캡처
일본 언론들의 보도도 시작됐다. 일본의 우익 정서를 대변하는 <산케이신문>은 24일 “한국의 저명한 여성작가인 신경숙이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 ‘우국’으로부터 문장을 훔쳐 쓴 사실을 사실상 인정해 한국 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이어 신씨가 23일치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 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내용 등도 소개했다. 이후 일본 <교토통신> 등 다른 언론들의 후속보도가 이어지고 있어, 이번 사태를 통해 혐한을 조장하려는 일본의 일부 주간지 등의 무책임한 보도도 이어지지 않을지 우려되는 실정이다.
문제는 신경숙 사태로 인해 해외 문예계가 한국문학에 대하여 저급하다고 일반적인 인식을 가질 경우 한국의 다른 양심적인 문학인들과 문학인재, 꿈나무들이 해외진출에 큰 우려가 될수도 있다는 점이다. 한편, 신경숙에 대해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소설가)는 한언론에 다음의 기고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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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베끼려면 문장이 아니라 정신을 베껴라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소설가)
같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먼저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힘들게 글 쓰는 줄은 정말 몰랐다. 작가에게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가령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꼬리뼈 부분이 짓물렀다거나 자판을 너무 두드려서 어깨가 돌처럼 굳거나 손가락 관절에 염증이 생기거나 뭐 이런 게 창작의 고통이다.
뭘 써야 할지 몰라 고민이거나 머릿속에 아무 것도 잡히는 단서가 없어서 멍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은 창작의 고통이 아니다. 그 단계까지 왔다면 글 쓰는 일 접어야 한다. 단언하지만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애초부터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하는 빈곤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구질구질한 변명일 뿐이다.
빈곤은 유혹에 약하다. 도덕적 불감증은 기어이 도둑질이라는 단계로 발전한다. 우아한 말로는 ‘표절’이라고 한다. ‘혼성 모방’이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포장되기도 한다. 뭐라고 부르든 장미가 장미인 것처럼 표절이든 혼성 모방이든 간에 결국 본질은 베껴 쓰기, 도둑질이다.
이번에 ‘또’ 불거진 신경숙 씨의 베껴 쓰기 연대기는 대략 1999년 무렵부터 시작된다. 누군가의 글을 토씨 몇 개 바꾸어 자기 글로 만들었다. 물론 어디선가 봤던 문장이 기억에 남았다가 부지불식 중 글에 묻어 들어갈 수는 있다.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고 사유의 공유지는 넓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차원이 아니었다. 원본 텍스트를 펼쳐놓고 그대로 옮겨 적지 않고는 불가능한 문장이었다. 불감증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병이었다. 알고 보니 고질병이고 불치병이었다.
그 뒤로도 신경숙 씨는 베껴 쓰기는 계속 된다. 루이제 린저, 패트릭 모디아노, 마루야마 겐지 등이 그 원본 텍스트의 저자들이었다(참 간도 크다). 문단은 알았고 독자들만 몰랐다. 평론가 두엇과 문학기자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문단은 방어하거나 침묵했다. 제대로 문제가 되었다면 이번 사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정도 상황까지 와야 비로소 문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표절은 두 종류다. 하나는 기획의도를 베끼는 거다. 문학은 좀 지겨우니까 영화로 예를 들어보자.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는 오우삼의 ‘첩혈쌍웅’을 베낀 것이다. 형사와 갱스터의 미묘한 우정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우리 영화 ‘광해’는 이반 라이트만 감독의 ‘데이브’를 베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대통령 대신 똑같이 생긴 사람을 찾아 허수아비로 앉혀 놓았는데 국정에 간여하질 않나 서로 닭 보듯 하던 영부인과 연정을 되살리지 않나 참모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는 내용인데 정말이지 염치없이 베꼈다. 둘은 문장을 베끼는 거다. 이번에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신경숙 씨의 ‘전설’이 그렇다.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 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 미시마 유키오 ‘우국’ 중에서 -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 신경숙 '전설' 중에서 -
역시 완벽한 필사(筆寫)다. 독자 여러분의 재미를 위해 이 필사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직접 보여드리겠다(내가 한다는 얘기다).
“두 사람 다 젊었다. 젊고 건강했으므로 두 사람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이 아니었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남자는 흙 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시간도 아까운 듯 현관에서부터 급하게 아내를 쓰러뜨렸다. 여자도 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육체의 교감을 나눈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여자는 즐거움을 아는 몸이 되었다. 환희에 찬 아내의 표정을 남자는 기뻐하며 즐겼다."
쓰는데 5분 정도 걸렸다. 필사를 하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미시마 유키오의 원본 텍스트를 서너 번 반복해서 읽었다. 혹시 문장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지 염려하면서, 가능하면 더 나은 표현으로 바꾸고 싶어서. 베껴 쓰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원본을 틈틈이 보지 않으면 베껴 쓰기가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신경숙 씨는 전혀 모르는 작품이라고 잡아뗐다. 이것은 웃기는 게 아니라 불쌍한 일이다. 베껴 쓰는 도중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게 과연 베낄 만한 문장인가. 겨우 이런 걸 베껴야 할 만큼 신경숙씨의 글쓰기는 가난한가.
출판사인 창비는 스스로 진흙탕에 몸을 던졌다. 창비는 ‘전설’의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 “일상적인 소재인데다가 작품 전체를 좌우할 독창적인 묘사도 아니다”라며 “이를 근거로 표절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해명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글을 전혀 모르는 무식한 출판사라고 광고하는 셈이고 위증이라면 참으로 가증스러운 발언이다.
게다가 창비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도하여 만든 대표적인 진보 성향 출판사다. 황석영의 ‘객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등이 여기서 나왔다. 진보는 도덕을 먹고 산다. 그런데 그 도덕이 이런 도덕이었다. 타인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책만 내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닭을 죽이기 싫었을 것이다. 이 닭 하나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데 수지타산부터 맞췄을 것이다. 위선과 욕심이 창비가 수십 년 쌓아온 명성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이제 창비는 도덕과 정의를 입에 올리면 안 된다. 진보연하면서 사람들을 홀렸던, 막강했던 한 시절의 좌파 문화 권력이 문을 닫을 때가 된 것이다.
신경숙 씨는 “이런 소란을 겪게 해 내 독자 분들께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풍파를 함께 해왔듯이 나를 믿어주시길 바랄뿐이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다. 상처만 남은 것은 신경숙 씨가 아니라 독자이며 믿어주시기를 바라기에는 표절 문제가 터져 나온 지난 15년 세월이 너무 길다. 진실 여부와 상관해서는 법원의 판단에 따르면 된다.
누구는 문단 내부에서 해결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것은 지적 재산권을 침해한 도둑질이다. 판결에 따라 ‘불법적 행위’에 대한 금전적 보상인 배상으로 베껴 쓰기에 대한 대가를 치루면 된다. 가장 최근의 인터뷰에서는 “문제가 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문장과 전설의 문장을 여러 차례 대조해본 결과 표절이란 문제 제기를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아무리 지난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했다.
표절은 했지만 기억은 없다는 얘기다. 그나마 옹호하던 독자들마저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믿을 수 없게 된 건 그녀의 스스로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신경숙 씨의 소설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건 또 무엇을 베낀 걸까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 현재 상황을 그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자. 미시마 유키오는 정신은 괴물이었지만 문학 하나는 진짜 ‘예술’이었다. 배를 가르러 가는 새벽까지도 그는 글을 썼다. 인생을 마감하러 가는 상황에서도 원고 마감은 지켰던 것이다. 베끼려면 이런 정신을 베낄 것이지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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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