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금융기구 경제외교전에 우리외교-자화자찬뿐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3위. 6개 국제 금융기구 고위직 1명.' 국제기구에서 차지하는 한국의 위상이다. 우리나라가 다음달로 끝나는 아시아개발은행(ADB) 지식관리 부총재직을 한국인이 맡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가운데 국제기구에서 차지하는 한국 외교의 현실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가 국제기구에 기여한 것에 비하면 제 몫을 찾아 먹지 못하고 있다는 경제외교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한국의 경제력이 높아지고 있는 반면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위상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을 포함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미주개발은행(IDB),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등이 한국이 가입한 6대 국제 금융기구다. 여기서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는 고위직은 오직 한 자리, 이창용 IMF 아시아·태평양국장뿐이다.
비경제 국제기구로 분류되는 국제연합(유엔) 산하 국제기구로 가도 상황은 비슷하다. 외교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유엔 정규예산의 1.994%를 부담해 세계에서 13번째로 많은 돈을 내고 있다. 분담금은 우리나라 경제력에 정확히 비례한다. 하지만 유엔본부 고위직 중 한국 사람은 5명으로 전체 고위직(D급 이상) 811명의 0.6%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현재 유엔 산하 82개 국제기구에 가입해 있다. 한국 사람은 45개 기구에서 총 530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 가운데 국장급 이상인 고위직은 27명에 불과하다. 무역 대국인 우리나라가 세계무역기구(WTO)에 파견한 고위직은 한 명도 없다. 또 세계식량계획(WFP) 유엔아동기금(UNICEF) 유엔개발계획(UNDP) 등에서도 고위직에 한국인은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보건기구(WHO)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주요 국제기구에도 고위직은 한 명 정도만이 진출해 있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경제 규모가 늘어나면서 국제기구 재원에서 우리가 부담하는 비율은 빠른 속도로 늘고 있지만 대접은 받지 못하고 있다. 돈만 많이 낼 뿐 국제기구 고위직에서 일할 만한 인재가 없고 정부 외교력도 아직 경제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아시아권에서는 오히려 더 초라하다. 아시아권에서 한국의 경제력은 중국과 일본 다음이다. 하지만 ADB에서 한국은 신명호 전 ADB 부총재가 물러난 2003년 이후 12년간 고위직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다. 정부는 우리 사람을 심어야 한다고 백방으로 뛰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 때문에 오는 6월 임기가 끝나는 빈두 로하니(네팔) ADB 지식관리 부총재 후임으로 국제기구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 전직 관료를 보내려는 정부의 노력이 눈물겹다. ADB는 아시아 개발을 위해 설립한 일본 주도의 국제 금융기구다. 총재는 역대로 일본인이 맡았으며 우리나라는 1992년부터 2003년까지 부총재직을 맡아 온 후 이 자리를 다른 개도국에 넘겨줬다.
우리 정부는 이번에는 이 자리를 되찾아 와야 한다며 여러 경로를 통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가 가세하면서 이달 중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에 진검 승부가 불가피해졌다. 정부는 이번에 ADB에 자본금 증액 등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실적인 지원과 함께 유세 활동을 방불케 할 만큼의 외교적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이번 주말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리는 ADB 연차총회에서 나카오 다케히코 ADB 총재(일본)를 만나 ADB 부총재에 한국 인사가 될 수 있도록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할 예정이다. 정부가 열심히 뛰고 있지만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가 이 자리를 노리고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ADB 지분율은 5.17%로 한국(5.06%)보다 다소 높다. ADB 총재국이면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이 우리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인 점도 부담스럽다. 일본이 인도네시아 후보를 지지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과거 국제기구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인사는 "부총재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총재를 비롯한 핵심 인사들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ADB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부총재가 된다는 것은 이 기구의 향후 운영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이해를 대변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IMF에서 미국 출신 부총재인 데이비드 립턴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공필 금융연구원 박사는 "국제 금융기구가 겉으로는 세계 경제 이익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주도권을 갖고 있는 나라들의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마닐라에서 ADB 부총재 자리를 놓고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반면 바다 건너 중국 베이징에서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자리를 놓고 아시아 유럽 중남미 57개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 지역의 금융 패권을 노리고 설립을 주도한 이 기구는 중국이 가장 많은 지분율을 갖고 총재도 중국인이 차지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56개 국가들은 나머지 지분을 놓고 0.1%라도 많은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제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29일 열린 첫 실무회의에서 중국은 참가국들에 회의 내용을 전혀 발설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할 만큼 보안에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각국 간 지분 경쟁의 결과가 흘러 나온다. 우선 러시아의 약진이 눈에 띈다. 러시아는 비아시아 국가이면서 첫 회의에서 아시아 국가로 분류돼 막대한 역내 프리미엄을 얻게 됐다. 이 결과 러시아는 단숨에 AIIB에서 지분율 2위 후보로 떠올랐다. 반면 인도 호주 한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는 러시아의 전과를 부러워하고 있다. 특히 이 기구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려던 우리나라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됐다. 러시아의 역내 진입으로 우리 지분율은 0.3%포인트 이상 하락하게 됐다.
정부 관계자는 "유럽과 아시아,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간 지분율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우리도 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 국가들에 부여되는 역내 프리미엄을 줄이기 위해, 개발도상국들은 지분율을 결정할 때 적용하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을 구매력 평가를 반영한 GDP로 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겉으로는 공정성을 표방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모두 자국의 지분율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한 명분이다.
지분율과 더불어 쟁점이 되는 것은 부총재 자리를 어느 나라가 확보하는가 하는 점이다. ADB 사례를 볼 때 AIIB에서 부총재 수는 6명 안팎이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벌써부터 이 자리를 이용해 외교전을 펼치고 있다. 참여를 고민하고 있는 일본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해 부총재 자리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참여가 못내 부담스럽다. 일본이 참여하면 우리의 지분율은 1%포인트가량 떨어진다.
또 의사결정 과정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일본이 참여하더라도 최대한 불리한 조건으로 들어오도록 외교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우리는 AIIB를 이끌고 있는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반면 AIIB를 다소 못마땅해 하는 우방국 미국의 눈치도 봐야 한다. 이래저래 다각적인 경제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ADB와 AIIB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를 확보하느냐는 우리나라의 경제 외교력을 재평가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건만 지금의 외교부는 자화자찬만 늘어놓고 있다.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