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장진호, 죽기2년전 DJ 불법정치자금 폭로 주목 <기자수첩1>
장회장 죽음이 주목된 계기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불법 정치자금 의혹을 폭로했던 장진호 전 진로그룹회장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생전 그가 남긴 발언에 대해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故장진호 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던 ‘홍성추씨’에 의하면, 지난 4월2일 저녁 진로그룹의 고위 직을 역임했던 모 인사가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북경에서의 전화였다. 이 인사는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였는데 장 회장과 통화를 해보라는 전언이었다. 직감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모씨는 “웬일이시냐”고 물었다. 이때 장 회장은 “힘들다. 괴롭다.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만취한 것 같아 내일 통화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다음날 이상해서 전화했더니 장 회장은 이미 운명을 한 상태였다.
故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한때 재계의 황태자로 잘나가는 30대 재벌 총수로 군림했던 전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은 국적도 말소된 상태에서 조국이 아닌 중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3세. 어쩌면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다. 홍씨는 지난 1990년 서울 서초동 진로 본사에서 장 전회장과 단독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전 직원들에게 집을 마련해 줘야 한다며 서울 신길동 공장 부지를 아파트로 개발, 싼 값에 직원들에게 분양했을 때다.
이때 장 회장은 “직원들이 회사를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너의 책임”이라면서 “무주택 직원들이 내 집을 가질 수 있으면 더 이상 행복이 어디 있겠냐”고 밝혔었다. 실제 진로그룹은 임직원들의 주택 유무를 파악해 무주택 직원들로 하여금 조합을 결성토록해 싼 값에 신길동과 월계동 주택을 공급했다. 그후 진로그룹은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승승장구했다. 재계에서도 성공한 2세 경영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진로의 최 전성기는 1996년이었다. 당시 연간 매출액이 3조원을 넘어섰고, 24개 계열사에 재계순위 19위에 랭크됐다. 소주하나로 유통과 건설 등을 아우르는 이른바 재벌의 반열에 정식으로 자리매김한 해였다.
진로의 몰락
그러나 진로의 성장은 그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무리한 몸 불리기를 한 ‘성장통’이 시작된 것이다. 1997년 4월 자금 압박을 받자 부도유예협약을 정부에 신청했다. 당시만해도 이 제도가 생소한 때였다. 정부는 서민의 애환이 담긴 소주의 대명사인 진로의 부도를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국내 최초로 부도유예협약을 적용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채권단 등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결국 그해 9월 부도를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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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진로그룹 경영을 책임진지 10년을 겨우 넘기고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 뒤에도 장 회장은 진로의 회생을 위해 백방의 노력을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사촌형(장익룡·사망), 이복형(장봉룡·사망)과의 경영권 싸움에 힘겹게 승리하며 진로를 재벌의 반열에까지 올려놨으나 진로는 창업 73년만에 ‘장씨 가문’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진로그룹 분쟁사
장학엽 창업주는 건강이 악화되자 자신의 조카인 장익룡 회장에게 경영을 맡겼다. 당시 2세들이 나이가 어린 탓이었다. 장익룡 회장이 진로를 이끌면서 점점 경영권을 강화하자 장진호 회장은 이복형인 장봉룡 회장 등과 합심해 사촌형을 경영진에서 물러나게 했다. 사촌 형을 몰아낸 뒤 두 형제는 한동안 밀월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다 이복형인 장봉룡 회장에게 ‘진로발효’를 떼어주고 모기업인 진로는 장진호 회장이 차지했다. 장진호 회장은 창업주의 후처소생이다. 적자는 이복형인 장봉룡 회장이다. 그러나 경영능력면에서 동생인 장진호 회장이 낫다고 판단한 주주들의 선택이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진로그룹 경영권 분쟁사다.
장익룡 (주)서광 회장(왼쪽), 장봉룡 진로발효 회장
그 뒤 진로는 미국계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가 채권을 사들여 최대 단일 채권자가 됐다. 골드만삭스는 2003년 화의 절차가 진행 중이던 진로에 대해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이 해 5월 서울지법 파산부는 골드만삭스의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들였다. 진로는 법정관리 상태에서 매각이 추진돼 2005년 4월 하이트맥주가 진로의 인수기업으로 결정됐다. 이 해 9월 진로는 법정관리를 졸업하고 경영을 정상화했다. 대한민국 소주의 대명사인 진로는 현재도 같은 브랜드로 국민의 사랑을 받지만 창업주 가족과는 전혀 관계없는 상태다.
장진호와 정치권의 관계
장 회장은 2003년 수천억원의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고 풀려났다가 2005년 캄보디아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집행유예기간에 해외에 나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국적마저 상실한 채로 무국적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캄보디아로 도피한 것은 그 나라가 주정의 원료인 ‘타피오카’의 주산지로 진로와는 특수한 관계가 있었다. 캄보디아에는 나름 지인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사업을 펼칠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었다. 그곳에서 금융회사를 만들어 재기하려고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결국 캄보디아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중국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다 지난 3일 최후를 맞은 것이다.
장 회장의 갑작스러 비보를 접한 옛 진로 임원들은 한결같이 장 회장은 “홧병으로 죽었다”고 입을 모았다. 무리한 확장 등으로 자금력에 이상이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IMF전이라 모든 기업들이 몸집 불리기에 나섰을 때였다는 것이다. 부채가 많았지만 기업 경영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임원은 2013년 월간조선 인터뷰에 장 회장의 한이 서려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지난 2013년 ‘월간조선’ 4월호에 실린 장 전 회장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전두환-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진로그룹은 '정치적 희생양'이 돼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장 전 회장은 “1984년부터 임춘원 전 의원을 통해 (주) 진로 주식과 자금을 DJ에게 제공했다”며 “DJ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속으로 DJ가 진로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1년 8개월 동안 일주일에 3일씩 검찰과 안기부 조사를 받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임춘원 전의원
1984년부터 10여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500억~600억원 가량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는데 오히려 대통령이 되고 나서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었다. 장 전 회장의 정치자금을 DJ에게 건넨 임 전 의원은 12ㆍ13ㆍ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한때 ‘DJ 자금책’으로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다. 임 전 의원은 2011년 간 질환으로 사망했다.
DJ에게 맺힌 한(恨)
1988년는 진로는 그룹체제로 개편, 사업다각화를 시도해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재계순위 25위까지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던 진로그룹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지나친 사세 확장에 따른 유동성 위기를 넘지 못하고 창업 73년 만에 부도처리됐다. 진로는 2003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5년 10월 하이트맥주에 매각됐다.
장진호 전 회장은 2013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불법·비리 정치자금에 관한 충격적 폭로를 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월간조선> 4월호에 실린 장 전 회장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전두환-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고, DJ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진로그룹은 '정치적 희생양'이 돼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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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가장 큰 정치 보복을 당한 피해자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무현 정권은 2003년 기업정상화를 목전에 둔 진로를 강제로 법정관리시켰다. 그리고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물리는 등 제가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전두환-김대중 간 거래의 보증인 역할을 하면서, 10여 년간 주식과 정치자금을 DJ에게 전달했다. 규모는 500억~600억원이다.” -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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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간 불법·비리 정치자금 의혹의 눈길을 지속적으로 받아 왔지만, 검찰 수사 선상을 교묘히 비껴가거나 무마되는 등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겨 왔다. 1967년 6월 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7대 총선에 출마하며 목포역 광장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통해 자신의 '청렴함'을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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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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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 전 회장이 고백한 내용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장 전 회장은 "전두환-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 간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고 자신은 그 중간에서 담보물로 주식을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아울러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며칠 후 대검찰청에서 자신을 호출했고 평소 안면이 있었던 윤 모 수사관이 다짜고짜‘새로운 각하의 부담을 줄여드려야 한다. 정리하자’고 말했다"며 "무려 1년 8개월간 정치보복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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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일주일에 3일씩 검찰과 안기부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그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이 안 될 것이다. 그 기간에 가택 압수수색도 5번이나 받았다. 나중에 알아보니까 DJ가 나를 조사하라고 두 번이나 그랬더라. 그러니까 1년8개월 동안 계속 족치고 조져댄 것이다.” -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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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 회장은 5공 초창기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DJ를 사형시키려 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자, DJ가 정치활동을 재개할 경우,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장치로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담보물로 DJ 측에 (주)진로 보유 지분 절반을 양도 후 매년 일정 정도의 정치자금을 줬고, 임춘원 의원이 그 주식을 관리하고 정치자금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임춘원 의원은 12·13·14대 야당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80년대 'DJ 자금책', '비자금 관리인'으로 세간에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71년 윤보선, 장준하와 함께 국민당을 창당했고, DJ와는 70년대 장준하의 비밀연락책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장 전 회장은 "84년부터 92년까지 DJ측에 정치자금을 제공해 왔다"며 "처음엔 30억원 정도로 얘기가 있었는데, 진행하다 보니까 보통 연간 40억원, 많이 갈 때는 50억원이 갔고, 다 합치면 500억~600억원 정도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임 의원은 자신이 소유한 '동교상호신용금고'와 '명동 서울증권 매장' 등을 장 전 회장으로 전달받은 돈의 '돈세탁' 창구로 이용했다고도 말했다. 이 같은 불법 정치자금의 내막은 DJ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 전 회장은 그 근거로 임 의원과 대화한 내용을 밝혔다.
“DJ와 의논하고 합의해서 진행하는 일’이라고 임춘원 의원이 얘기했다. 한번은 임 의원이 ‘DJ가 너무 많이 요구해서 힘들지만 내 선에서 줄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장 전 회장의 주장은 구체적인 검증과정이 필요하지만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DJ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왔으면서도 '청렴'을 내세운 '위선자'의 오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앞서 지난 2009년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도 “김대중 정권 실세들이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20조원짜리 회사를 뜯어먹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번 장 전 회장의 사망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불법 정치비자금’ 의혹에 대한 여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를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기업경영 전문가에 의하면, 대게 기업은 초기에 영리의 의지로 기업인력과 네트워크, 비용을 갖추게 되고 조직구축기에 활력을 갖는다. 그리고 기업 성장, 안정기에 대부분 조직내부의 지분, 이권다툼이 일어난다. 또 그것을 잘넘기면 이번에는 기업존속이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유착하게 되며 권력은 이점을 잘 노린다. 진로그룹의 성장,발전,해체, 오너의 죽음을 보면서 국민들은 또 정경유착의 폐해를 보고있다.
그러나 기자도 故장진호 회장의 죽음을 계기로 해묵은 지역감정을 들추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정경유착, 불법비리도 없어져야 하지만 권력의 기업에 대한 부당한 괴롭힘도 이제는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다 여타 정권과는 달리 아직도 DJ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확실한 조명은 없었다. 많은 부산지역 시민들과 국민들 그리고 진로소주 애호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잊지말자 장진호!"
권맑은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