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兩岸·중국과 대만)관계 긴장 고조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대만이 28일(현지시간) 2·28 사건 70주년을 맞았다. 이 사건은 국민당 군인과 경찰이 차별에 항거한 대만 주민들을 유혈 진입한 일로, 최대 2만8000명의 희생자를 남겼다. 시위와 파업은 1947년 2월 27일 시작됐다. 국민당 전매국 단속반원이 무허가로 담배를 팔던 노점상 여인을 구타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단속에 항의하는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자 주민들의 봉기는 28일 대만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에 1945년 패망한 일제로부터 대만을 인수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는 대만 행정장관의 요청에 2개 사단 병력을 보내 대만 주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이로 인해 1만8000~2만8000명이 희생됐다고 2·28사건 연구보고는 추산했다.
명(明)나라 때부터 대만에 건너와 살았던 중국계 후손인 본성인(本省人)과 광복 이후 중국에서 건너온 외성인(外省人) 간 차별은 봉기가 격화된 배경이 됐다. 당시 외성인은 인구에서 채 20%가 안됐지만 기득권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후 장제스는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 전 국가주석에 쫓겨 대만으로 넘어왔으며 1975년 타계할 때까지 계엄령 아래에 있던 대만을 통치했다. 이로 인해 2·28 사건은 금기어가 됐다. 이후에도 긴 시간 동안 이 사건은 입에 올릴 수 없는 역사였다. 그러다 1995년 국민당 소속의 리덩휘(李登?) 당시 총통이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국가 차원의 배상을 약속하면서 사건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 등의 작업은 국민당 마잉주(馬英九·2008~2016) 총통의 집권으로 거의 중단됐다.
특히 올해의 2·28 사건 기념식은 의미가 깊다. 독립 성향의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정부 출범 이후 처음 맞은 행사이기 때문이다. 대만 정부는 기념일에 앞서 타이베이(臺北) 한복판에 있는 ‘중정(中正·장제스의 본명)기념당’의 용도 변경을 진행하고 있다. 기념당 내 장제스와 관련한 흔적도 지우고 있다. 지난 2000년 국민당 장기집권을 무너뜨린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기념당을 '대만 민주기념관'으로 바꿨지만 마잉주 전 총통이 원상복구시켰다. 아울러 차이 총통은 지난 23일에는 사건 당시 대만의 행정장관이 장제스에게 군 병력을 요청하며 보낸 전문도 처음 공개했다.
최근 들어 중국은 차이 총통이 '92컨센서스'(92공식·1992년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합의)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독립 성향의 행보를 보이는 것과 관련해 대만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지난주 중국의 대만사무를 총괄하는 국무원 대만판공실은 대만 독립 지지자들이 "갈등을 유발시키고 여론을 분열시키기 위해" 기념식을 조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중국 공산당은 당시 주민들의 봉기를 1949년 공산당 승리로 이어진 전체 투쟁의 일부로 보고 있고 있는 반면 대만은 본성인의 동의 없이 대만을 통치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발로 여기고 있다.
스포츠닷컴 국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