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푸미콘 아둔야뎃’ 국왕 서거
태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푸미콘 아둔야뎃 국왕이 13일(현지시간) 서거하면서 태국 정국은 상당기간 불투명한 안개 속을 멤돌 전망이다. 당장 후계자로 지목된 왕세자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크지 않은데다 태국의 복잡한 정세 속에 정치집단간 갈등도 폭발할 수 있어 긴장감은 커지고 있다. 세계 최장수 재위 기록을 가진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은 이날 오후 3시52분 투병중이던 시리라즈 병원에서 향년 88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쁘라윳 찬-오차 태국 총리는 즉각 "정부는 왕위 승계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며, 국왕께서 지난 1972년 왕세자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을 국가입법회의에 통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푸미폰 국왕은 지난 1972년 유일한 왕자이자 장손인 와치라롱껀(64)을 왕세자이자 후계자로 공식 지명한 바 있다. 쁘라윳 총리는 앞으로 1년간 애도기간을 두겠다고 선언했고 30일간 축제를 열지 말라고 당부했다. 국왕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태국은 깊은 슬픔 속에 잠겼다.
푸미폰 국왕이 신병치료를 해온 방콕 시내 시리라즈 병원에는 늦은 시간임에도 국왕을 추모하기 위한 시민들이 몰려들면서 심한 혼잡을 빚었고, 경찰 통제로 병원에 들어서지 못하는 시민들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쉽게 목격됐다. 당국이 병원 인근 도로의 차량 진입을 차단하면서 몇 ㎞를 걸어가야 국왕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 근처로 갈 수 있었지만 시민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푸미폰 국왕은 1946년 6월 9일부터 이날까지 70년 126일간 왕위를 유지해오며, 태국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의 재위기간인 70년 126일은 세계 최장 재위 기록이다. 1952년 2월부터 영국을 통치해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보다도 재위 기간이 5년 이상 길다. 단순히 재위기간만 긴 것은 아니었다. 비록 예전 절대군주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입헌 군주제도의 왕이었지만 푸미폰 국왕은 명실상부한 태국 국민들의 ‘정신적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재임 기간 무려 19차례의 쿠데타와 20회나 개헌이 있었을 만큼 태국 근현대사는 혼란 속의 태국 근현대사였지만 그 격변기마다 푸미폰 국왕은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태국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왔다.
푸미폰 국왕은 부친이 의학공부를 위해 도미한 까닭에 1927년 12월5일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친형인 아난다 마히돈(라마 8세) 국왕이 1946년 약관의 나이로 승하한 뒤 즉위했고 절대왕정 폐지로 추락하던 왕실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50년대에는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한해 200일 이상을 시골에서 지내는 등 가난한 농민과 소외된 소수민족의 아픔을 직접 겪으면서 현군으로서 자질을 쌓았고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수립된 ‘로얄 프로젝트’라는 사업은 농업, 수자원, 환경, 고용, 보건, 복지 등 국민들의 기초적 생활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으며 1988년에는 북부의 소수 종족인 고산족의 복지를 개선한 공로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다. 푸미폰 국왕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고질적인 군부 반란 속에서도 중재자로 나서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3년 군부가 민주화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향해 발포하자 학생들에게 궁전 문을 개방하는가 하면 1992년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수친다 크라프라윤 당시 총리를 강하게 비판해 실각을 주도했다. 민주화 시위로 희생자가 발생하자 거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비통해한 모습이 공개되면서 국민들을 감동시켰고 태국 민주화의 근간이 됐다. 반면, 십 수번 반복된 태국의 군부 쿠데타를 종종 용인한 부분은 정치적 오점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가장 최근인 2006년 9월 손티 분야랏끌린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 일으킨 쿠데타를 공식 승인하면서 1997년 제정된 민주 헌법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당시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이던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곧바로 축출됐다.
스포츠닷컴 국제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