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복 대기자]
"가난 때문에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원망도 했지만 지금은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광복 70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 독립유공자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유공자 유족과 후손들은 저마다의 고통과 어려움을 토로했다. 보이지 않는 멸시와 외면 속에서 살아온 유족과 후손들. 이들이 과거를 회상할 때는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양옥모(74·여)씨의 아버지 독립운동가 고(故) 양승만씨는 1919년 3·1운동 당시 경기 양평 일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만든 태극기 100여개를 사람들에게 나눠줘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일제에 쫓겨 가족과 중국으로 도피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한국 귀국을 돕기도 했지만 정작 자신은 중국 공산당에 붙잡혀 한 달 넘게 수감생활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친 임씨 가족은 결국 지붕 없는 집 밖에 없던 중국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양씨가 한국으로 들어온 건 지난 2011년이다. 숨진 아버지와 여동생을 대신해 독립유공자 정착지원금을 이어 받을 사람이 자신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령의 언니들은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행을 마다했다. 하지만 한국에 온 뒤에도 양씨의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정부 지원금으로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반지하 전세를 구했을 뿐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일자리를 주는 곳이 없어 돈을 못 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매월 20만원을 받고 있지만 식비로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아버지가 받은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에 따른 유공자 연금 118만원은 서열상 중국에 있는 큰 언니에게 지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양씨는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눈을 돌렸다. 복지관을 돌다니면서 장애인 등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청소부터 김장까지 다양한 봉사활동을 했다. 아버지가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받은 혜택을 이웃들에게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한 위대한 일만큼은 아니지만 봉사활동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낀다"며 "광복 70주년인 내년에는 중국에 있는 딸과 아들을 한국에 데려와 함께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독립유공자 고(故) 이양섭씨의 증조카 이인종(61)씨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대부분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다"며 "자수성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저 밥 먹고 사는데 만족할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씨는 학비가 없어서 중학교 2학년 때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유공자 후손들에 대한 학비 지원제도가 있었지만 어느 정도 성적이 나와야 지급되는 장학금 개념이라 성적이 안나온 그로서는 이를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큰 할아버지가 경기 안성에 갖고 있던 1만여평이 넘는 땅도 일제에 빼앗겼다가 광복 후 국가 소유로 귀속됐다. 땅문서 등 대부분 서류가 6·25 전쟁 때 소실된 탓이다.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 중 자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큰 할아버지가 건국훈장 국민장(3등급)을 받았지만 이씨를 비롯한 후손들의 생활은 녹록치 않다. 현재 이씨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가게 겸 집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도 무허가 건물이다. 그래서 반년에 한 번씩 수백만원의 벌금을 내라는 구청의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이씨는 "큰 할아버지는 3·1운동 이후 안성의 파출소와 면사무소를 습격·점거하다 체포돼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며 "생활은 힘들지만 큰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아베 총리의 망언에도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제대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며 "중국처럼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나라로 성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복달(83) 할머니의 남편 고(故) 오태순씨(건국훈장 애족장)는 일제시대 때 일본 헌병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있는 한 이웃을 구하기 위해 헌병들과 싸움을 벌였다가 교도소로 끌려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문을 당했다.
광복 이후 남편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봉급이 너무 적어 자녀들과 함께 학교 사택이나 남의 집을 전전해야 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두 딸의 도움으로 방배동에 전셋집을 구해 홀로 살고 있다. 그런데 집이 지어진지 30년이 넘어 녹물이 나오고 난방도 제대로 안된다고 한다. 오는 4월이면 계약이 끝나 다른 집을 알아보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전셋값에 임대아파트를 알아보게 됐는데 번번히 지방 소재 아파트로만 선정됐다.
김 할머니는 "서울로 선정이 안되면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이곳 유족회도 올 수 없게 된다"며 "내 집처럼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살다가 남은 생을 마감할 수 있게 정부가 유족들에게 임대아파트 지급시 지역 등을 고려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근영(71) 유족회 사무총장은 "일본에 앞잡이 노릇을 했던 반역자의 후손들은 지금도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며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 피해의식까지 생긴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박 사무총장의 할아버지 고(故) 박환규씨는 전북 정읍에서 3·1운동을 전후해 자택에서 태극기와 현수막, 유인물 등을 직접 만들어 독립운동을 주도한 운동가이다. 정부는 지난 1986년 그에게 애족장을 수훈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서 그동안 연금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공자의 사망 시점이 광복 이전이냐 이후이냐에 따라 연금을 받을 수 있는 대(代)의 범위가 달라지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광복 이후 숨진 독립유공자의 손자대에도 연금이 지급되게 됐다.
그는 "우리 일가에서 받게 되는 첫 연금이지만 이는 개개인이 아닌 가문 전체에 지급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일가는 나를 포함해 동순위에 있는 13명이 연금 120만원을 나눠 가져야하는 형편"이라며 실소했다. 박 사무총장이 지난 1998년 유족회에 들어왔던 것도 유공자의 후손으로서 다른 유족과 후손들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함이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남은 과제가 아직도 많다. 그는 "무엇보다도 정부는 친일재산 환수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삼열 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은 "광복 70주년을 맞았지만 친일 반역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유공자 유족과 후손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고 있는게 우리 민족정기의 현 주소"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대우 받는 사회가 될 때라야 나라가 어려울 때 누구든 몸을 바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한편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사망자를 포함한 전체 독립유공자는 7378명으로 1월 현재 살아 있는 독립유공자는 88명이다. 다만 독립유공자 유족과 후손 수 등은 정확한 파악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