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이라고? 애들은 손가락 빤다! <문예 기고문>

posted Nov 0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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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이라고?   애들은 손가락 빤다 !

<문예기고문>

 

 

                                      <맑은샘> 권병찬-언론인, 시인, 작가

                                                   (현) 한국일보 정책특집팀 부장

                                                   (현) 스포츠닷컴 특별취재부장 (객원기자)

                                                   (현) <사>대한민국장 장인(匠人)예술협회 이사

                                                   (현) 한국신춘문예 협회 정회원

 

국내 인문학계에서 발터 벤야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만만치 않다. 2012년 교수신문에 따르면 2008~2011년 국문학계가 가장 많이 인용한 외국 이론가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러나 저울 반대편에 국내 저자가 쓴 벤야민 연구서를 올리면 눈금은 형편 없이 휘청댄다. 시중에 나와 있는 벤야민 연구서 수십 권 중 번역서를 빼면 남는 것은 대여섯 권뿐. 이 간극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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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그는 누구인가?

 

발터 벤야민은 1892년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서 고미술품상이었던 아버지 에밀 벤야민(Emil Benjamin, 1856-1926)과 어머니 파울리네(Pauline, 1869-1930)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일사회에 편입되어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그는 유년시절을 베를린에서 보냈는데, 그 시기의 기억은 그의 책인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려 있다. 청년시절 그는 청년운동으로서의 구스타프 비네켄(Gustav Wyneken)의 그룹에 가담했고 거기서 젊은 시절 친구인 시인 하인레(Christoph Friedrich Heinle)를 만났다.

 

1912년 프리드리히 왕립학교를 졸업한 이후, 벤야민은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 독문학,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였고 베를린으로 옮겨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1488일 그의 친구인 하인레의 자살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벤야민은 그의 죽은 친구를 위해서 시를 지어서 바치고 하인레의 유작을 출판해주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점차 높아지는 전쟁열 때문에 그는 스승이었던 비네켄과 작별하게 된다. 같은 해, 벤야민은 자신보다 4살 어린 수학도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을 알게 되고 그와 평생 친구로 남는다. 1917년 도라 켈너(Dora Kellner)와 결혼하였지만, 결혼생활은 13년 만에 파경에 이르고 둘 사이에는 아들 슈테판 라파엘(Stefan Rafael, 1918-1972)이 있다. 결혼과 함께 (또한 점차 높아지는 징병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베른으로 이동, 2년후 리하르트 헤르베르츠(Richard Herbertz)의 지도 아래 그의 박사학위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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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후, 벤야민은 자유기고가와 독립출판가로 활동한다. 1921년 보들레르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번역가의 역할"이라는 에세이를 책 서두에 넣는다. 그가 같은해 출판한 철학 에세이인 "폭력의 비평"은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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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라는 잡지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1923, 24년 교수자격 심사 논문을 제출하고자 프랑크푸르트로 떠난다. 거기서 벤야민은 그보다 어린 아도르노(Theodor Adorno),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와 친분을 쌓는다. 그의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비극의 원천>은 벤야민이 기존의 학술계과 비교해서 상당히 파격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국 벤야민은 이 논문이 심사에서 공식적으로 탈락되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 1925년 스스로 교수자격 논문제출을 포기한다.

 

1926년에서 27년까지 벤야민은 파리에서 지내면서 프란츠 헤셀(Franz Hessel)과 함께 프루스트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을 한다. 1924년경부터 갖게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를 1926, 27년 겨울에 모스크바로 향하게 한다.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 점점 동정을 하게 됨에 불구하고 벤야민은 평생 동안 그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라는 위치를 고수한다.

 

*벤야민의 사상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독일 출신의 유태계 언어철학자, 번역가, 좌파 지식인으로서 한때 20세기 독일어권 최고의 비평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프라이부르크, 뮌헨 대학 등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중 나중에 평생의 친구이자 유대사상에서 지적 동반자가 된 게르숌 숄렘을 만난다. 전쟁을 피해 스위스로 간 그는 1919독일낭만주의 비평개념에 대한 연구로 베른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신문과 잡지에 기고를 하거나 번역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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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괴테의 소설에 대한 비평문 괴테의 친화력을 통해 당대의 보수적인 문예학의 풍토를 비판하기도 한다. 1924년 교수자격논문인 독일 비극의 원천을 집필하지만 아카데미 세계로 진출하려던 계획은 결국 좌절하고 만다. 같은 해 알게 된 연인 아샤 라치스 이외에 나중에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서 유물론적 사유의 영향을 받으면서 비평, 번역, 방송 활동을 펼쳐나간다. 1928년 출간된 철학적인 아포리즘 모음집 일방통행로는 그가 즐겨 왕래하던 프랑스에서 당시 태동한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받은 영향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나중에 그의 정신적 유산의 관리자가 된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비롯해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를 알게 되면서 이들과 지적 교분을 나눈다.

 

파시즘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유럽에서 스스로 좌파 아웃사이더로 이해한 그가 택한 길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고, 유대신학적 사유와 유물론적 사유, 신비주의와 계몽적 사유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아방가르드적 실험정신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통해 현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성찰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었다. 초현실주의를 비롯해 마르셀 프루스트, 베르톨트 브레히트, 프란츠 카프카, 카를 크라우스, 샤를 보들레르, 니콜라이 레스코프 등에 대한 글 이외에 그는 생산자로서의 작가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등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글을 발표한다.

 

1940년 벤야민은 당시 뉴욕에서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원을 받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를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결한다. 그로써 그가 13년간 매달렸던 프로젝트, 즉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의 구상을 상부구조(문화) 전체에 적용하여 19세기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하려던 필생의 저작 파사주(Das Passagen-Werk)는 미완으로 남는다. 스탈린-히틀러의 밀약을 접한 충격에서 쓴 유물론적 역사철학의 결정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다.

 

게오르그 짐멜의 에세이적 글쓰기 스타일이 엿보이는 벤야민은 뛰어난 산문가였고, 모더니티, 매체미학, 언어철학, 역사철학에 대한 글들을 비롯해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모티프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그의 사상은 70년대 전집 발간 이래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주목받고 있으며, 자크 데리다, 조르지오 아감벤 등 현대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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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학계의 벤야민

 

독일 출신 유대인인 벤야민은 마흔 여덟의 나이에 자살하기 직전까지 늘 나치의 위협과 가난에 쫓겼다. 노트 살 돈이 없어 편지지, 엽서 뒷면, 차표 뒷장에 빼곡하게 쓴 그의 글은 파편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독일의 신좌파 사상가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그것을 정리해 책으로 펴낸 게 벤야민이 죽고 32년이나 지난 1972년이다. 그의 글을 체계화해 묶는 작업이 더딘 데는 벤야민 글의 특징도 한 몫 한다. 극도로 난해한 문체와 어마어마한 논리의 비약, 역사, 문화, 예술, 신학, 매체, 법 등 다방면에 뻗어 있는 그의 관심사는, 전문 연구가들조차 그 논리의 틈을 메우는 데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들어서야 벤야민의 주요 저서들이 번역돼 나온 한국에서 그에 대한 주체적연구 결과가 드문 것은 당연한 일이다. 6월에 출간된 최성만 이화여대 독문과 교수의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은 단순 독해에서 벗어나 한국 연구자가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벤야민을 재구성한 드문 책이다. 그리고 최근 문광훈 충북대 독문학과 교수가 가면들의 병기창-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을 출간했다.

 

문 교수는 이 책에서 벤야민을 소개하고 이해하는 데서 한 발 더 나가, 21세기 한국 사회에 벤야민이 어떻게 소용되는가를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저자는 벤야민의 생전에 출간된 네 권의 저서를 비롯해 500편이 넘는 논문과 논설, 서평, 소책자, 정치적 선전문구, 플래카드, 포스터 등을 모두 찾아 읽은 뒤 현재에 맞춰 재구성했다. 6년의 산고를 거쳐 나온 이 책은 올해를 벤야민의 한국적 수용이 물꼬를 튼 첫 해로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문광훈 충북대 독문학과 교수의 벤야민

 

_어떤 계기로 지금, 여기에벤야민을 불러내려고 시도했나.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상가 중 벤야민 만큼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그는 문학과 비평, 매체학, 미학, 철학, 정치이론, 도시분석, 자본주의 비판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새 지평을 열었다. 지금까지 많은 국내 연구자들의 공헌으로 그의 사상이 소개됐지만 아쉬운 건 한국에서, 한국어로 쓰인, 한국의 학문적 문화 유산으로 남은 벤야민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모든 훌륭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벤야민은 다면체와 같은 사람이다. 국내 연구자가 그 다면체 중 핵심 부분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 고유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작업이 지금 필요하다. 자크 데리다가 해석한 벤야민의 법 개념은 훌륭한 모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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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한국의 벤야민 수용이 왜곡되거나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저술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 같다.

 

그렇다. 국내에서 벤야민은 주로 정치적으로 해석돼 왔다. 벤야민은 마르크스를 연구했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아웃사이더였다. 정치적 틀 안에 벤야민을 집어 넣는 방식으로는 그의 다채로운 면모를 성실하게 풀어냈다고 할 수 없다. 15장에서는 벤야민이 어떻게 행복을 이해하는가를 다뤘는데, 이런 것도 정치의식만큼 중요하다. 벤야민을 왜곡하고 축소하는 것은 그의 고향인 독일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독일에서 나온 벤야민 연구자 100명 중 90명에 동의할 수 없다. 책을 쓰면서 고수한 원칙 중 2차 문헌(해설서)에 비판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있었다. 서구의 사정에 맞게 해석한 벤야민이 아닌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벤야민의 면모를 취사선택하기 위한 것이다.”

 

_21세기 한국사회에 벤야민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지식이든, 감수성이든, 삶의 태도든.

 

지금 한국 사회는 나쁜 의미에서 사회적인 것의 과부하 상태다. 많은 이들이 사회 정의를 외치지만 이 말들은 모두 여러 이해 관계에 의해 이데올로기화 돼있다. , 진실을 말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진실을 말하니 따라오라고 요구하며 따라가지 않으면 소외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 뿌리에는 언어의 오용이 있다. 언어를 전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개인의 내면을 성실하게 좇는 데 사용하는 것 자체가 윤리고 사회적 기여일 수 있다. 벤야민은 대립하는 사회에서 양자택일을 하는 게 아니라 개체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는 데 집중했다. 거기에 사용한 언어는 풍요롭고 섬세하고 내밀했다. 지금 벤야민의 언어가 필요한 이유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한국 사회 전반을 흔든 대형 사건들이 있다. 여기에도 벤야민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는 늘 모든 당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었다. 우리의 가치체계를 흔드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금 자신이 말하는 게 정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증오와 폭력은 현저히 감소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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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계몽은 모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아드르노, 호르크하이머>

                                                                   <맑은샘>

 

 

*벤야민을 지원한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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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르노 : 아드르노는 호르크하이머와 긴밀한 협업을 통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형성했고 소위(근대이성의 한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19039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1924년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훗설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평생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1927년 이후 베를린에 자주 체류하면서 벤아민, 브레히트, 블로흐, 바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나치의 탄압으로 미국으로 피신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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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크하이머 : 호르크하이머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공부한 후 1925년 칸트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얻었다. 1930년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철학교수가 되어 대학부속 사회문제연구소장을 지냈으며 E 프롬, 하버트 마르쿠제 등과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루었다. 나치스 정권 수립후에는 스위스로 이주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했고, 2차대전후 독일로 되돌아왔다.

 

두 사람이 한 작업의 주된 대상은 기존의 철학에서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비개념적인 것, 비 동일 자, 특수한 것 들이었다. 객체중심으로만 사고를 해서 주체와 객체 사이의 위계질서를 깨뜨리는 것이 작업의 목표였다. (인간의 이성을 새로운 하나님으로 만들지 말라) 라는 것이 두 사람이 말한 주제이다. 이때 이성은 중세시대의 신(God)중심의 사고를 깨뜨려 버린 실존주의자들이나 니체가 말한 근대이성, 즉 인간중심의 이성을 말하는데 나찌스를 경험 한 이들은 이 인간의 이성도 새로운 하나님으로 등장하여 인간을 새롭게 억압하니 인간의 이성으로 새로운 하나님 짓거리, 쇼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얼핏보면 누구라도 이 말에 굉장한 공감을 할 것이고 예리한 말 같으나 필자가 보기에 문제는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도 마르크스를 공부했고 여전히 변증법적 사고의 한계를 벋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2차대전의 전쟁기간 중 그들은 인간의 무기력 앞에 주목했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이성을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다시 고민할 필요를 느꼈다. 20세기 초반은 밝음과 어둠이 선명하게 교차한 시대였다. 20세기는 과학기술과 생산력의 눈부신 발전을 경험한 시대였으며 동시에 대파국의 시대였다.

 

독일의 히틀러는 죽음의 공장을 가동하여 대량학살을 자행했으며 스탈린 시대의 구쏘련은 비대한 공산관료제로 말미암아 파국으로 치달았고 미국의 문화산업시스템은 자율적인 예술과 비판적인 대중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렸다. 20세기는 지식과 폭력이 얼마든지 결탁할 수 있음을 증명한 시대라고 두 사람은 지적했다.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1930년대말까지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라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명제를 지지했다. 그러나 전체주의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리지 않고 전면적으로 진행되면서 그 명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야만과 문명, 신화와 계몽의 이분법을 분쇄하는 새로운 역사인식을 수립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지난 십년간 한국사회의 지식인들 중에서, 또는 구 열린 우리당(사실상 닫힌 뚜껑당)의 논평중에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말자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인가?(마치 자신들만이 깨우쳤고 선진인것처럼....) 근대사회에서 계몽, 진보, 이성, 합리는 어느 체계를 막론하고 무비판적인 근본전제이자 목표였다. 그러나 이 전제와 목표는 인류에게 정신적,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사회적, 자연적 파국도 초래했다. 따라서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인류가 인간적인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여기에 그들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류역사의 진행은 발전과 퇴행의 계기를 동시에 포함한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의 역설적인 과정을 날카롭게 신좌파적인 변증법적 사고로 통찰했을 뿐이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말을 한다. “인간 이성의 비합리성을 직시하면서 이성이 항상 지배와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지배가 자연뿐 아니라 인간 자신과 사회에까지 확대되어 있음을.” 그들의 이 말속에는 날카로움은 있지만 아름다움이 없다. 마치 자신들이 똑똑하다는 것은 은연중에 교묘히 풍기지만 인간 자신으로써의 극복대안이 항상 없는 것이고 명확하지 않는 비도그마가 있다.

 

필자는 생각한다. 도그마의 오류를 깨었으면 대책없는 비도그마가 아니라 새롭고 더 낳고 현실적인 자생적 도그마도 필요한 것 아닌가? (마르크스 도그마를 깨지 못하고 거기서 조금, 주류경제학에서 조금 엉터리 자료와 통계를 뜯었다 붙였다 하는 '토마 피게티'같은 사기꾼짓 하지말고  기존 독과점 규제이론을 깨어버리고 현실적 구체적 실질적인 맞춤형 규제이론을 선보인  2014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장 티롤"을 보라 !)  그래야 그들의 변증법적 사고에도 맞지 않는가? 변증법적인 사고로 날카롭게 문제를 지적하고 깨뜨리고도 자신들의 비도그마적 무대책에는 늘 할 말이 없는 군상, 그것이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제이고 오늘날 우리에게 "생각의 낡음"이 아닐까? 한다.

 

결국 자신들은 마르크시스트는 아니라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들 사상도 맑스에서 출발했고 자기해방 사상의 자기 잘난 멋만 아는 부류들만 양산해 내는 군상들일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이들을 비판없이 추종만 하면 무슨 중도하자, 실용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해서 교묘히 자기 잘난 척을 하고 대책이 없는 중도하자는 이야기 말이다. 이것은 마르크시스트가 자신들은 아니라해도 중도라는 전형적인 가면아래 자기를 숨길수 있는 마스크일 뿐이고 기회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사상이 될 수 있음을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에는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좋아한다면서 왜 이리도 중도하자는 부류가 많고 중도의 종류도 많으며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자들이 득실득실 하는가? 유시민을 잘 생각해 보시라.

 

*이들이 쓴 (계몽의 변증법: Dialektik der Aufkla"rung)이란 어떤 책인가?

 

계몽의 섬뜩한 광기가 생산해냈던 아우슈비츠의 비명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우리도 일제시대의 만주 731부대의 만행을 기억하고 있고 지금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위 두 사건에 버금가는 잔인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광기가 가능한가?"에 대해 좀 진지한 고민을 한 철학자들이 바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드르노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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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이러한 광기의 원인을 이성의 신화, 또는 계몽이 만들어냈다고 이야기 한다. 계몽의 개념 자체에 내포된 저 퇴보의 싹은 현대사회의 곳곳에 뿌려져 세상을 야만의 시대로 만들어 가고 있다. 중심의 암흑사회를 인간중심의 사회로 만든 계몽의 야심찬 기획은 때로는 문화라는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뒤집어 쓴 채 나타나기도 하고 합리성과 효율성의 이름으로 인간의 신체와 의식을 검열하는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2차대전의 와중에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몸서리치며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해나간 호르크하이머와 아드르노의 저작 (계몽의 변증법)이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사회에도 반팽이 지식인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은 다음의 문구로 스스로를 선전하고 있다. (*지배의 사슬에서 계몽을 분리하기.....),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효시......) 라고 말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논문은 합리성과 사회현실의 뒤엉킴, 그리고 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자연과 자연지배의 뒤엉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작성되었다. 여기서 행해진 계몽에 대한 비판은 맹목적인 지배에 연루된 상태에서 계몽을 풀어내줄 계몽의 긍정적 개념을 마련해 준다.

 

첫 번째 부연설명은 특수한 대상들을 중심으로 논의된다. 시민적, 서구적 문명을 대변하는 최초의 증인인 오딧세이를 중심으로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을 추적한다. 두 번째 부연 설명은 계몽의 무자비한 완성자인 칸트와 사드, 그리고 니체를 다룬다. 이 것이 보여주는 것은 (모든 자연적인 것을 오만한 주체밑에 굴복시키는 것이 궁극에는 맹목적인 객체성과 자연성의 지배 속에서 어떻게 정점에 이르고 있는가이다.) 이 책의 문화산업에 관한 장은 계몽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로 퇴보하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영화와 라디오에서 이러한 퇴보의 전형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계몽은 무엇보다 생산과 분배에서 효과와 테크닉을 계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기존질서와 함께 테크닉을 조종하는 권력을 신격화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러한 모순을 다룸에 있어서 문화산업은 그 자신이 스스로 요청하는 것보다 좀 더 진지하게 취급되었다. 반유대주의의 요소들을 명제별로 다룬 장은 계몽된 문명이 실제 현실에서 어떻게 야만상태로 회귀하는가를 보여준다.

 

자기파괴로의 실제적인 경향이 합리성 안에는 처음부터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의 철학적인 원역사가 구상되었다. 나머지 부분들은 스케치와 구상들을 묶어놓은 것으로 일부는 앞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른 일부는 향후에 작업할 문제들의 윤곽을 잠정적으로 그려본 것이고 그 대부분은 (변증법적 인류학)과 관계된다.

 

계몽의 기획은 현대세계에서 계속 중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마르크스주의", "노옴 춈스키의 언어학",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계몽으로부터 내려온 사상 전통속에 자리잡은, 서로 커다란 차이가 있는 지식유파 중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포스트 구조주의 사상"은 계몽이성의 강압적이거나 독재적인 경향을 폭로하려 하면서 계몽이성과 같은 보편적으로 유효한 체계나 능력의 존재를 단호히 부정했다.

 

현대사상에 있어서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의 중요한 효시는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이다. 이 책은 계몽이성이 역사상으로 드러낸 도구적 이성으로의 쇠락을 설명했다. 그 설명은 기술공학적 지배가 자본주의를 촉진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에게 확대되었다는 것을 강조만 한다. 따라서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러한 변천 때문에 이성이 해방적인 힘을 잃고 지배와 억압의 세력이 되었다고만 주장하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을 주장하는 자들, 무엇이 문제인가?

 

계몽은 대략 17세기 후반 반세기와 18세기를 포함하는 유럽에 팽배했던 사상에 대한 일반적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계몽사상가들은 미신과 맹신을 배격했으며 이성을 찬양했다. 이러한 이성을 사람들은 인간이 생활하는 모든 영역을 개선시켜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성적 사고에 의한 정념의 통제, 과학과 기술에 의한 자연의 정복, 보다 책임있고 민주적인 통치형태로 전제정치를 대체하는 민주주의의 발전 등이 모두 계몽의 형태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신(God)중심의 세계관을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바꾸자는 것이었고 문제는 이렇게 바꾸어 놓았더니 나치스, 파시즘 같은 것, 인간의 이성이 인간의 새 하나님으로 등극했다는 것이고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새로운 이성으로도 새 하나님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그 사상적 근원이 변증법이라서 문제인 것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실체현상이라는 것들도 과연 변화하기는 변화하는데 두 사람의 말처럼 변증법적으로만 변화 하는가? 절대로 아니다. 필자가 글을 쓰는 책상의 다알리아는 보기에 아름답지만 영점 몇 초 간격으로 사실상 세포분열하고 있다. 필자와 가끔 통화하는 아름다운 여자 친구는 미인이지만 매일 자신의 얼굴에 기미가 없는지 신경 쓰고 있다. 자고 나면 늘 어제의 그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다. 미세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포가 변화한다. 필자의 몇 달전 몸무게는 좀 비만스러웠지만 새벽마다의 수영과 헬스운동, 숲 산책, 취재 보도로 지금은 15kg이 빠졌다.

 

이것이 과연 변증법적으로 변화한 것인가? 나는 두 사람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계몽의 변증을 이야기한 반팽이 작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농촌계몽운동은 과연 진정 진실하게 농민이 운동주체였던가? 좌파인 당신은 아직도 농민운동의 운동주체는 농민이어야하고 농민임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보고 그렇게 말하면 절대 거짓이고 사기라고 본다.

 

필자가 알기로 대한민국의 모든 농촌계몽운동은 농민들이 주체가 아니었다. 그 주체는 바로 도시에서 공부한 좌파 지식인들이었다. 그 옛날 샤르트르를 말하고 앙드레부르통과 쉬르 리얼리즘을 읽으면서 마로니에공원의 교정에서 막걸리 마시며 마르크스를 읽었고 계집애들을 꾀던 고등 룸펜 양아치들이었다. 낭만도 지나쳐서 그 낭만의 가치가 무슨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날나리 사상으로 둔갑하여 농촌가서 계몽운동을 하기도 한 것 아닌가?

 

생각을 해 보시라. 농촌에서 노동하기도 바쁜 농부들이 무슨 시()를 알것이며 불어인 파르티쟌이라는 단어를 알 것인가? 무슨 농민시, 혁명시, 도시빈민가의 사회적 반영을 읊었다는 시, 이런 것들의 이면과 진실을 보면 진정한 농민이 지은 시가 어디 있는가? 모두들 당신들 소행이다.

 

예전, 김대중은 솔직히 진정한 문화, 예술정신과 철학에 무식했고 햇볓정책의 도구로 이용했으며 노무현정권 들어서 좌파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무슨 랭보의 원어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 리얼리즘 흉내낸다고 자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진정 마르크스 원본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 박가의 X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별 저급함을 다풀고 불어도 모르고 영어도 잘하지도 못하는 늙은이가 평양을 갔다와서는 무슨 자기도 노벨 문학상을 타야 하는지 온 지구 동네방네 나라 시인 망신을 다하고, 심지어 국가반역음모에 동조까지 했다. 이것이 좌파라고 하더라도 진정 그대들이 원하는 지식인의 소행인가? 대안이 없고 대책이 없는 군상들아.

 

우리 우파 문학도 필자가 보기에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맨날 무슨 문학계에는 선생같지도 않은 선생님에게 대한 아부, 권모술수 뿐이고 도무지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맨날 문학, 예술은 사회적 반영이다.” 라는 다 낡아 빠진 구호를 수십년간 주구장창 되뇌이고 있을 뿐이다. 인문학부가 왜 위기일까요?

 

솔직히 말해서 외국에 좀 다녀와 본 필자로써는 대한민국만큼 공부하지 않는 인문학부들을 가진 대학들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 맨날 메이져신문의 신춘문예는 자기제자 뽑았다. 표절이다. 라는 시비가 끊이지 않고 문학, 시 전공학과는 그냥 들어가도 되는 하위점수학과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뭐하는 짓거리인가? 그 부패의 사회적 메커니즘구조도 밝히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단이다. 나는 솔직히 시()를 좋아하는 제자에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문학을 하려면 유명해지려고 노력하는 문학보다 진정한 문학, 훌륭한 문학을 해라...

 

사실 시인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 사회의 카나리아 역활을 해야만 한다. 정치가 처칠도 정치인이면서 문학인이기도 했고 단테도 그랬고 그 외 수많은 대 법률가, 역사가들, 사상가, 교수, 공학 전문가, 언론인, 경제대가들이 선진유럽, 구미에서는 시인이었고 문학도였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다 시인이었다. 공자도 그러하지 않는가? (요즘 뉴욕과 미국의 일급 대학에서는 중국정부의 공자학을 폐기하고 있다.) 성경도 시()의 보고다.

 

문학도들도 공부해야 훌륭한 시, 좋은 시, 굵직한 시들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 문단의 시인들은 좀 솔직히 필자가 보기에 아니다 싶다. 직업이 없어 맨날 빌빌 하는 군상들, 맨날 땅파먹고 술퍼먹는 양아치, 쓰레기들 뿐이다. 나는 한국의 당대 지식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호르크하이머나 아드르노를 팔면서,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법학, 기타 사회과학과 사회적 실질 현실태를 모르면서, 무슨 개떡같은 "중도, 실용"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강하게 촉구한다. 그런 당신들은 진정한 예술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다. 정신없는 딸랑이들일 뿐이다.

 

정치, 군사학의 진실을 모르고서 김대중의 사기햇볓정책에 놀아나 중도를 이야기 하고 무슨 통일독일의 민족감정을 치유하는 것처럼 우리도 문학으로 남, 북의 민족감정을 치유하자는 새빨간 몽상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 경제, 사회를 넘는 시와 문학이 왜 나오지 못하는가? 이것은 대한민국 문단의 비극이다. 치졸함이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쓰레기, 권력같지도 않은 문단권력의 마약에 취해 김대중, 노무현에게 놀아나는 양아치 표퓰리즘 문학 양산 작태이다. 기본실력도 없으면서 노벨 문학상은 무슨 노벨 문학상이더냐?

 

이러니 이 양아치들에게 속은 또 문학을 모르는 정가에서 무슨 "중도다,실용이다"하면서, 교묘히 중도와 실용을 말하면서, 새누리당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는 작태 아닌가? 문학같지도 않은 정치 쓰레기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제자에게 말했다 제발 유명해 지려고 노력하지 말고 훌륭해 지려고 노력해라. 아드르노와 호르크 하이머의 문제와 그들을 자기 주체성없이 추종하며 폼을 잡는 얼치기들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너희들은 "대신 자리한 인간의 새로운 이성으로도 새 하나님을 만들지 말라는 것"인바, 그렇게 떠드는 쓰래기 너희들은 왜, 어린 아이의 창자를 끊어 순대를 만들어 먹는 악마의 행위를 하고(이는 어느 탈북자에 의해 미 상원에서 폭로 공개 되었다.) 수천만이 굶어죽는대도 아랑곳 하지 않는 김정일의 만행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조용한 것인가? 하는 점이고, 개혁개방을 외치면서도 수만명을 살해하고 산채로 사람의 장기를 적출한 중국공산당의 현재, 만행에 대해서는 세계의 언론들이 다 아는데도 한마디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가?

 

 

*베끼기만 하면 능사인가? 아드르노와 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리고 발터 벤야민을 비판하지 못하는 인문학계는 반성해야 한다.

 

우리 국문학계를 포함한 인문학계가 죽어간다는 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발터 벤야민 정도도 자체 제대로 번역 수용해서 비평할 수 있는 지력이 없기 때문이고 비평자체가 아직 그들 이론을 냅다 베끼기도 바쁜데 있기 때문이다. , 현실태의 우리사회와 그에 기반한 문예비평은 명확한 외국이론 수용을 넘어서 인문학 뿐만 아니라 제반 사회과학의 통섭적 현실 구체적 문예비평으로 탄생해야 현실적으로 가능한데 발터 벤야민 수용, 비판이 아니라 이제 겨우 베껴오기도 급급 바쁘니 현실사회와 동떨어진 끼워맞추기식 몽상적 이론베껴 폼잡아 비평으로 어떻게 그 총합적 지적이 가능하고 대안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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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기업은 인문학도나 졸업자들이 필요가 없고 인문학도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사회패잔병, 사회낭인이 되어 맨날 몽상에 젖어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이다. 우리대학은 아직도 국문학,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우리대학은 좀 글로벌하게 영미학, 유럽인문학, 중동학, 유라시아학 이렇게 좀 능동적이며 공격적인 학문을 하지 못할까?